2009년 9월 1일 화요일

벽 너머의 세계를 마주하기_환

<벽 너머의 세계를 마주하기>

prologue.

주니어 3학기를 준비하는 예비학교 프로그램이 진행되던 여름이었다. 그 예비학교 과정에 참여하고 있던 중학교 후배가 내게 찾아와서 왜 다니던 학교에서 계속 고등과정까지 다니지 않고 하자를 선택했느냐고 물었다. 내가 중등과정을 다녔던 ‘이우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붙어 있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거의 대부분은 같은 학교 고등과정으로 거의 그대로 진학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다. 그 후배는 왜 남들처럼 하지 않고 굳이 이우를 떠나기로 했는지, 동시에 하자는 어떤 곳이기에 이곳에 있기로 했는지를 묻고 있었다. 혹은, 어쩌면 왜 ‘인가’고등학교가 아닌 ‘비인가’대안학교를 선택해 굳이 ‘탈학교’생의 길을 가냐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내 친구들은 내가 공부를 하기 싫어 뛰쳐나온 것이라 종종 오해를 하곤 하던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공부하기를 싫어하지도 않았고, 학교에서의 성적도 괜찮은 축에 속했다. 그 이상의 성적을 받아보려고 악착같이 노력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의문이 들었다. 난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교실에 앉아있는 시간들이 아까워지기 시작했었다. 학교가 내 욕구를 채워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내가 ‘뭔가 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줄 곳이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온 곳이 하자였다. 면접 당일은 듣기만 해도 겁이 나는 8:3이란 수로 8은 하자의 판돌들이었고 3은 나와 내 부모님이었다. 꽤 오래된 일이라 무슨 질문을 들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고 하고 싶지만 사실은 잊고 싶었던 것뿐이었는지 최근엔 그때의 기억들이 조각조각 떠오르곤 한다. 그때 가장 내 기억에 남았던 말은 마지막에 부모님이 했던 말이다.

“저희는 얘가 자신을 지켜주고 지원해주고 있는 보호막이 있는 동안에는 최대한 힘들어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보면 정말 오싹한 말이지만, 그때의 내 머릿속에 강하게 박혀 들어왔다.

1. 벽 안에서 살던 아이

어디에나 그런 애들이 있다. 시간만 나면 이상한 책을 읽고 있고, 남들과 대화도 잘 안하고, 혼자 웃고, 또 가끔은 떡하니 옆에 있는데도 옆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사람들 말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한 그런 사람들은 자기 세계가 선명하다. 개성 있다고도 표현할 수 있지만 그 선명도는 너무 뚜렷해서 가끔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혀 다른 세계’의 아이로 낙인 되어 그들과 멀어지게 되기 십상이다. 그럴수록 그 애는 자기 세계에 빠지고, 악순환이 계속 될 뿐이다. 그런 내가 하자작업장학교를 다닐 거라고 결정하자 많은 사람들이 놀랬다. 그때는 단순히 내가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해서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볼 때 그들 중 누군가는 ‘그 성격으로 어디를 가서 어떻게 지내니,’라는 걱정을 했을 것 같다.

남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나의 세계를 굳건히 하며 지내겠다던 나를 하자는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난 시선을 안으로만 두고 내 안만 보면서 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자에서는 계속 밖을 보라고 말했다. 내 옆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세계도 봐야했다. 정말 힘든 일이었다. 나만 보기 위해 있던 내 세계를 하자 사람들은 계속 들여다보려고 하고, 누군가는 너무도 예리하게 꿰뚫어보고, 또 ‘아, 네 세계는 이러저러 하구나,’ 하는 등, 그냥 지나쳐가 주지 않았다. 외부인 차단용 벽이 튼튼하다고 믿었는데, 감탄이 나올 정도로―물론 감탄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허술한 부분을 짚어내고 가끔은 벽 자체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지낼수록 차단용 벽이 제 역할을 못하고 무너지게 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나는 그게 무서웠다. ‘나’만의 세계를 벗어나야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못했고 그것을 벗어난 삶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길찾기 때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 벽을 공사하여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회의 시간에는 의견을 잘 내지 않았고―내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편이 아니라서 의견 자체가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혼자 열심히 해도 되는 프로젝트에는 열심이었다. 프로젝트들이 끝나는 시간이면 바로 가방 싸서 집에 가는 식으로―솔직히 집이 먼 탓도 있었다. 이때 난 용인에서 통학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했었다. 그러니 모두가 함께 해야만 하는 작업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래로 만드는 우리들의 이야기> 프로젝트나 <노리단> 프로젝트는 혼자서 하기엔 스케일이 큰 프로젝트들이었기 때문에(노래 만들고 대본 쓰고 연출 짜고 소품 구하고, 리듬 만들고 등등) ‘팀’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프로젝트였다. 나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는지, 후반으로 갈수록 진행이 어려웠고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한동안은 아무도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아했고 막판에 쇼하자를 해야만 한다는 무거움에 무작정 무대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길찾기 과정의 후반에 하자에서 대안학교 합창대회가 열렸다. 마침 <노래로 만드는 우리들의 이야기>시간에 이란 곡으로 합창을 하고 있던 우리도 참여하게 되었다. 낯선 얼굴들이 999클럽을 채우고 있자하니 긴장되어서 아랫배가 꼬인 듯 잔뜩 불편한 기분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내 심장은 무대에 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크고 빠르게 뛰었다. 당장에라도 토하러 화장실로 뛰어가야 할 것 같더니 무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내 몸은 연습했던 대로 움직였고 순간 내 앞에 누가 있던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있어도 즐겁게 노래했을 거라는 마음이었다.

그 합창대회를 계기로 나에게 공연팀인 <촌닭들>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제의였다. 나는 글쓰기 팀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글쓰기 팀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소설쓰기를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개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니어 작업장들 중 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내 세계에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공연팀은 정반대였다. 노래극 했던 것처럼 팀을 이루어야하고 내 세계를 1순위로 두기 힘들 것이 뻔했다. 다른 사람의 세계를 봐야하고 다른 사람이 나의 세계를 봐야할 것이다. 나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안 하겠다고 거절을 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마도 공연 무대에 오르기 전의 터질 듯한 심장과 긴장감, 그리고 무대에 오른 순간의 그 하얀 백지장을 닮은 막막한 동시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설레임을 맛보았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오랫동안 고민했고 여러 사람에게 그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찌하면 좋겠는지, 너의 의견은 어떤지를 물으러 간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난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그런 행동들을 취했던 것 같다. 내가 정말로 공연팀이 싫었다면 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도 전에(의견에 말려들기 전에) 먼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2. 팀으로 지내는 법

그때의 난 사람이란 우주의 별과 비슷하다고 믿었다. 각자의 궤도를 돌며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별들이라고 말이다. 모든 사람은 뜨거운 열을 낼 빛을 갖고 태어났고 빠르게 가든 느리게 가든 삶이라는 우주 속을 주욱 돌고, 별들이 충돌하면 폭발하듯이 사람 역시도 충돌하면 폭발할 거라고 믿었다. 나는 내가 폭발할까봐 충돌을 최대한 피하면서 지내왔다. 팀에 들어간다는 것은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많은 그룹일수록 어떤 방향으로든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름의 각오를 하고 들어간 촌닭들은 유리벽을 서로의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 누구도 딱히 서로 친해보이지도 않았고, 그 유리벽을 이용해서 서로 간의 충돌을 막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벽은 오히려 깨지기 쉬워 위험해 보였다. ‘개인감정을 갖고 오지 말자,’와 ‘그냥 친해지지 않는다. 일로써 친해진다,’라는 규칙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높을 벽을 만들고 있다고 느꼈다. 때론 그 유리벽이 서로의 눈빛과 목소리마저 차단시키는지 회의를 할 때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시간이 되었고 도저히 합의를 볼 것 같지도 않았다. 길찾기 때 했던 회의들은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최대한 ‘설득’하고 ‘합의’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촌닭들에선 아니었다.

그런 모습이 무섭고 <흉내내기 워크숍>도 잘 안 풀려서 나는 또 내 세계에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은 즐겁게 워크숍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발전도 크게 없고, 그 낯선 브라질 음악을 익히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내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결정은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촌닭들의 지켜야할 태도 no.1은 All-in이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나의 모든 걸 촌닭들 안에 던져버리기를 요구했다. 그게 안 된다면 안 되게 만드는 요소를 포기하라고도 요구했다. 내 취미 생활 침해로 많이 고통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의 이 All-in이라는 것은 팀으로 지낼 때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준 것 같다. 팀에 집중하는 자세와 내가 팀에 힘을 기울일수록 겉도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솔직히 돌아보면 좀 지나쳤던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팀 안에서는 역시나 길찾기 때와는 달리 다른 마음을 먹고 있을 수 없었다. 다른 마음을 먹기 시작하면 마음이 점점 멀어지게 되어있었다. 한 학기 정도가 지나서 촌닭들이 막 익숙해질 즈음, 갑자기 ‘2학기’라는 이름으로 나는 더 이상 '신입 촌닭'이 아니었다. 새로운 촌닭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우리는 흉내내기 워크숍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익숙해지기 위해 시간을 보낸 첫 학기와는 다른 역할로 지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역할이란 것이 무작정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 적절한 역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하며 2학기도 지나갔다.

내 세계 안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밖으로 나가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던 내가 3학기에 ‘팀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만 컸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잘하고 싶은지에 대한 계획 없이 모든 것을 다 잘하겠다는 다짐만 있던 시작이었다. 팀장으로서 가장 먼저 하려고 했던 것은 역할 분장이었다. 그 전까지는 일이 늘 팀장에게만 쏠려있었기 때문에도 그렇고, 모두가 팀 안에서 방황하지 않고 역할을 갖고 있었으면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입단원들과 마주하며 새로운 한 학기를 여는 첫날, 촌닭들에 대해 설명하고 시간표를 설명하는 날부터 나는 나에게서 부족함을 느꼈다. 미리 멘트도 짜가고 선물도 준비했지만 막상 당일을 지내니 이렇게 얼떨떨하고 확신이 서지 않는 개학 첫날이 또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지가 되고 신뢰가 가는 팀장이 되고 싶었는데, 첫날부터 일이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 뒤로도 나름의 준비를 하던 나는 아침 모임이나 연출카페, 등등의 많은 상황들이 직접 닥쳐오자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인 마냥 당혹스럽고 어쩔 줄 모를 때가 많았다. 더군다나 시니어인 엽과 역할의 조율도 되지 않아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전 팀장인 나르샤라면 어떻게 했을까? 당혹스러운 상황이 발생할 때 나는 내 자신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간단한 질문이 나중에는 나와 나르샤를 비교하면서 내 스스로를 탓하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촌닭들에게 잘 닿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부터 넘치는 카리스마를 바라게 되었고 끝없이 촌닭들이라는 공연팀 안에서 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평안하게 한 학기가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 나의 상태가 영향을 끼쳤을까, 단원들이 나에게 찾아와 쉬고 싶다던가, 힘들다는 이야기들을 털어놓게 되었다. 문제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와 엽에게만 털어놨다는 것이다. 다른 단원들은 서로에게 고민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뿐,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 촌닭들을 떠나게 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단원들은 그 일방적인 통보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는 나와 진이 <지구마을 젊은 주민들>에 지원서를 내고 면접까지 봤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준비할 시간이 적어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우리는 면접이 끝난 다음에서야 이번 학기 팀의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 학기가 끝나갈 즈음, “지구마을 젊은 주민들이 뭐야?”라는 충격적인 발언도 나오게 되었다.

마음은 각자 딴 곳에 가있고,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팀이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도 모르는 촌닭들이 어떻게 유지되었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기는 너무 아슬아슬해서 유지되었던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때의 난 각자가 갖고 있어야 하는 끈들을 나 혼자만 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팀이라면 서로의 끈은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이 되어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나는 그 끈들을 모두 모아 한손에 쥐고 각자 다른 방향의 길로 가려는 것을 애써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학기 도중에 나간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았고, 그들의 떠난다는 결정이 내가 팀장을 잘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더 손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내 정신은 오직 그 끈들을 놓치지 않고 가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서 나는 다른 것까지 할 자신이 없었다. 결석은 하지 않았지만 말 그대로 ‘출석’만 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할 때도 거기에 있었지만 그저 있을 뿐이었다. 과제를 내주면 빠뜨리는 거 없이 해오긴 하지만 해야 할 일을 기계적으로 하는 것뿐이었다. 그 이상의 고민도 성과도 없었다.

주니어 첫 학기 때 하자 통역교실 <스피카자>가 결성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모여 번역작업을 했고, 후반에는 하자를 영어로 투어 하는 작업도 했다. 그 다음 학기에는 <글로비시(Global+English)>를 자신이 속해있는 팀에게 가르쳐주는 작업을 했다. 3학기 때는 스피카자의 일이 점점 더 커졌다. 글로비시 라운지를 준비하고 아침에 일찍 모여서 토플 공부를 했다. 팀의 문제에 정신이 쏠려있는 나에게 그것까지 함께하는 건 힘들고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스피카자를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못해서 리사와 토토에게 묻어가기도 했다. 글로비시 프로젝트에서도 나는 그저 거기에 있기만 했다.

어느 날 히옥스가 알리바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프로젝트를 알리바이 삼지 말라는 말이었다. 내가 스피카자를 알리바이 삼고 있었다.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선에서만 일하고 그러면서도 나도 같이 있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4학기 때는 이래선 안 되겠다고 여겨 리사와 토토에게 내 상황을 말했고 스피카자에서의 비중을 줄이게 되었다. 그전까지 종종 다른 상황에서도 난 프로젝트들을 알리바이 삼고 있었다. 난 내가 ‘성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무결석, 늘 참여하는 성실함으로는 ‘열심히 했다’고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결국에 내 3학기가 병에 걸리는 걸로 끝이 나자 4학기가 시작될 때는 그때를 그저 ‘한때 힘든 시기’로 묻어두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팀장 역시도 내가 잘하고 싶었던 만큼 하지 못해서 ‘전 리더보다 서포터가 나은 것 같아요’라면서 그때의 한 학기를 부정하려고 했었다. 팀장이라는 이름이 없다고 리더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랬어도 스스로가 느끼기에 달라진 점들도 있었다. 당혹스러워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중심이 잡힌 듯이 차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따라야하는 팀장과 팀이 아닌 서로가 파트너인 팀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촌닭들이 그런 팀이 되기를 바라며 움직였다.

촌닭들이 즐거워졌던 건 아무래도 내가 내 악기에 정을 붙이고 재미도 붙이기 시작했을 때부터인 것 같다. 다른 악기도 가끔 연주했지만 내 메인 악기로 침바우와 땀보린을 치게 되었다. 흉내내기 워크숍이 끝나고 나자 다른 사람들은 바투카다 악기를 하나씩만 맡았는데, 난 두 개를 맡고 있었다. 연습에 대한 부담감이 컸지만 둘 중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침바우는 리듬이 아주 튀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가진 바투카다 악기들 중 유일하게 손으로 치는 악기니만큼 주목받는 악기였다. 땀보린은 작지만 소리만은 가장 크고 높았다. 그리고 테크닉을 요구했기 때문에 연습을 많이 해야 했다.

침바우는 인기가 많은 악기였다. 연습 시간에 다른 사람이 침바우를 치고 있으면 난 땀보린을 쥐면서도 신경 쓰여서 도저히 연습할 수가 없었다. 어느 새면 나보다 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위기감에 난 마치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은 아이처럼 내 악기를 쥐고 세 학기동안 내려놓지 않았다. 내가 그 악기들을 계속 치기 위해선 연습밖에 없었지만, 3학기 때 즈음부터 전체적으로 우리가 느슨해지고 연습을 안 하게 되자 나 역시도 긴장을 놓으며 연습을 안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촌닭들을 시작하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공연’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공연에 대해 기대를 많이 했었다. 정식으로 첫 공연이었던 달맞이 축제 이후의 공연들은 나에게 큰 실망이었다. 공연이라는 것은 자신감이 넘치고 아주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고 마음에서부터 즐거워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촌닭들의 공연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 틀릴까 조마조마할 때도 있었고, 그 걱정 때문에 난 즐겁지 않은데 즐거운 척 해야 했다. 심지어는 정해진 레퍼토리를 벗어나지 못해 지겨웠고 편곡을 잘 못해서 공연하는 나조차도 지루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레퍼토리를 늘릴수록 공연 역시도 더 많은 걸 요구했다. 틀려도 애드리브로 처리할 수 있을 만한 실력과 순발력이나 서로에게 맞추며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유연함, 당황하는 얼굴을 숨길 수 있는 담대함 말이다. 그리고 그런 조건들을 채웠다고 생각되는 공연은 꾸밀 필요 없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하지만 우리가 놓쳤던 부분은 우리 공연의 역할이었다. 우리를 부른 행사마다 우리에게 기대한 역할이나 효과가 있었을 텐데, 가끔은 전혀 생각도 못하고 우리에게 즐거울 공연만 짜고 있었다. 촌닭들, 아니, 이제 새 단원을 맞고 새롭게 재정비한 <페스테자(Festeza)>는 공연이든 워크숍이든 단순히 볼거리로 시간을 채우는 게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로 관객과 수강생들을 자극시키는 팀이 되기를 바란다.

3. 다른 삶에 대한 질문.

내가 주니어 2학기 때 오랜만에 옛 학교의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그들은 내가 진학하지 않기로 한 이우고등학교의 재학생들이었고 촌닭들의 공연을 한번 본 적이 있었다.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거 계속 하면서 지내는 거냐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앞으로도 몇 학기 더 할 거라고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가 “그거 계속 하는 거야?”라고 물어봤지만 ‘그거’라는 건 그 친구가 본 한 번의 공연을 의미하는 것뿐이라 그 자리에서의 인정은 ‘공연만’ 하고 지낼 거라는 대답으로 오해를 산 것 같았다. 친구들의 표정은 ‘앞으로 1년 정도 그것만 하고 지낼 거라고?’라는 듯,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주 내가 하는 일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는데 어려움을 느꼈었다.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공연 팀에서 지내고 있어요’라는 말은 ‘공연만 하면서 지내요’로 들리는지, 사람들은 얼떨떨한 표정이다. 심지어 우리 할머니는 내가 가수가 될 것이고 그걸 위한 훈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신다. “나 일반 학교 다녀요”라는 말은 어째서 사람들에게 ‘그래, 당연히 열심히 공부하면서 잘 지내는구나,’라고 해석될 수 있는 걸까? 마치 일반 학교에 재학 중인 것이 유일하게 인정된, 아니, 유일하게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대안학교의 ‘인정되지 않은’ 교육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 외의 설명이 필요 없는 일반 학교와는 달리 늘 설명이, 때론 설명이라고 하기엔 좀 섭섭한 해명이 따른다. 가끔은 설명하고 있는 내가 설명이 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거나 지나치게 상대를 설득하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럼, 그렇게 말하는 넌 도대체 뭘 배웠니? 그런 생각이 슬슬 들 수도 있겠다. 사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건 쉽지 않다. 내게는 ‘국영수사과 하고 있어요’라는 말만큼이나 상대방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잘못 말하면 엄청나게 뻔하고 찌질한 성장 스토리가 나올 것만 같아서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내가 하자의 주니어로 지낼 때 가장 놀랐던 건 길찾기를 수료한 뒤에 주니어가 되기 위해 썼던 주니어 지원서를 매 학기 써야한다는 것이었다. 한 학기를 끝내면 보통 학교처럼 졸업할 때까지 별 생각 없이 주욱 있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학기가 시작되면 내가 이번 학기를 어떤 자세로, 어떤 생각으로 움직일 것인지 계획을 짜야했고 학기 동안에 할 프로젝트들을 통해서 자신이 무얼 배울 것인지에 대한 계획서도 짜야했다. 중요한 것은 학기마다 변하는 작업장학교의 전체 키워드와 자신의 키워드를 연결 짓는 작업이다. 한번은 작업장학교의 키워드가 인 적이 있었는데, 나는 거의 그 단어를 잊고 지냈다. 그러니 의 한 학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다. 전혀 그 단어와 관련되게 학기를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자신의 학습계획서를 써서 계약을 하면 학기의 중반에는 내가 세웠던 학습 설계도대로 잘 왔는지, 만약 처음에 세웠던 계획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중간점검도 하고, 한 학기가 거의 다 끝나갈 때는 내 학습계약서를 기반으로 어떤 한 학기를 보냈는지를 에세이에 담아야했다.

1학기 때는 학습계약을 하는데만 한 학기를 다 보냈다. 그때는 학습계약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학기가 갈수록 더 그것에 무게를 실었다. 한 학기 동안 할 프로젝트들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배우고 싶고 배울 수 있는지, 내가 원하는 나의 한 학기 키워드를 위해서 어떤 프로젝트에 더 열중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오랜 시간동안 고민하며 썼지만 늘 내가 세웠던 학습계획서의 방향대로 움직이게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방향이 어떻게 틀어졌는지를 알고 앞으로의 계획을 수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마 하자에서는 자신의 발걸음이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를 향해 어떻게 걸을 것인지를 알고 계획하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 각자가 선택한 팀의 매체를 통한 학습 역시도 중요했다. 가끔은 내가 공연팀에 있고 공연을 다닌다고 하면 나중에 무대와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 미리 체험하고 경력을 쌓으려는 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건 쉽지 않았다. 뒤따라올 시선과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힘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걸 전공할 것이 아니면 왜 시간을 거기에 투자하는지, 그걸 하고 나서의 계획에 도움이 되는지, 아무 계획이 없다면 대학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냐는 질문이 쏟아져올 테니까 말이다. 한 번은 너무 귀찮아서 공연을 하고 있고 공연 기획도 하고 페이도 받고 있다고 말해버린 적도 있었다. 내가 뭐하는지 물어본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서 나름 안심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건너뛰고 공연 일을 하고 있다는 걸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다.

공연 기획이나 페이를 받는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초기 촌닭들은 창업 팀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습보다는 퀄리티가 높은 공연이 더 중요하긴 했다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공연을 위해서 연습시간을 상당히 많이 쓰고 보컬과 퍼커션 트레이닝 워크숍도 받고 있지만, 공연은 단순히 노래하고 춤추고 악기 치고 끝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공연 역시도 끝없는 생각과 고민을 해야 한다. 팀워크를 배워가며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자기 호흡을 알고, 단원들 안에서 호흡을 맞춰야 한다. 관객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어떻게 관객들에게 낯설고 동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우리를 초대한 행사와도 호흡을 맞추기 위한 고민들을 놓아서는 안 된다. 가끔은 갑작스럽게 공연을 해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준비할 틈도 없이 당일 날에 공연이 생긴다던가, 생각도 안했는데 앵콜이 나오는 상황들 말이다. 그 외의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늘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한다.

하자에선 인문학 수업 또한 중요하게 여긴다. 1학기 때 내가 수없이 모모에게 인문학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 내 세계밖에 모르던 내게는 무척이나 생소한 수업이었다. 인간의 문화와 문학을 다루면서 질문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말이다. 그때의 인문학 수업은 김찬호 선생님과 함께 했고 <문화의 발견>이라는 책 중심적으로 수업을 했다. 나는 잘 가지 않는 곳들인 노래방, 공원 등의 장소들을 다시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왜 그냥 지나치는 것들을 굳이 붙잡고 질문하나 싶었다. 그 때 내가 내린 인문학의 정의는 일상적인 것들을 다른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것이 인문학의 가장 기초적인 걸음이라는 생각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 질문하고 알아가면서 ‘나’라는 사람에서부터 점점 시야를 넓혀가는 것이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질문들, 이전부터 삶을 채우던 것들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이해하고 나는 어떤 자세로 그 질문들을 대하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내 벽에 끝없이 부딪쳐온 것이 하자와 공연팀이었다면 인문학은 서서히 허물어져가던 벽 너머의 세계를 보여준 것 같다.

epilogue.

하자의 2년 반을 마무리하려는 시점에서 보니 어느 새인가 그렇게 단단히 쌓아두려고 하던 벽이 반쯤 허물어져버린 것 같다. 이제야 벽의 너머에 있던 세계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 어느 느낀다. 이대로 벽을 꾸준히 허물어 낼 것인지, 다시 벽을 쌓고 나만의 세계로 돌아갈 것인지, 또는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지, 내게는 몇몇 선택지가 있다. 지금의 나는 반쯤 허물어진 벽을 넘어볼까 한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과 관심들에 계속 벽을 쌓고 안으로, 안으로 깊숙이 숨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내가 밖으로 나가 타인과 세상으로 부딪치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면접 자리에서 부모님이 내게 말했던 보호막은 단지 내가 어떤 고통을 덜 수 있게 해주는 진통제도 아니었고, 외부의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쿠션 같은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그건 내게 애벌레의 실 같은 것이었다. 그저 가지고만 있다가 애벌레로 삶을 끝낼 것인지, 아니면 고치가 될 것인지의 선택은 나에게 달렸다. 문득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을 떠올린다. 줄무늬 애벌레와 함께 지내는 것 밖에 모르던 노랑 애벌레가 고치를 만나게 되는 순간을. 나는 하자에서 세상엔 애벌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치가 되기 위해 실을 뽑아내고 천천히 나를 돌돌 감싸는 작업이 얼마나 걸릴지, 그 뒤엔 고치로 얼마나의 시간을 보내야할지, 그리고 그 뒤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고치를 떠날 수 있는지, 삶은 끊임없이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 또한 중요한 배움이었다. 아직 먼 길이 남아있다는 것을 안다. 어쩜 평생 애벌레로 살았을지도 모를 내가 조금 더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기 위한 시간을 여기 하자에서 보내왔다. 이제는 이곳에서의 수료를 준비하며 이후의 먼 길을 떠날 마음을 단단히 다져본다.

댓글 3개:

  1. '애벌레와 함께 지내는 것 밖에 모르던'
    지내는 것밖에 아닌가요? 한글에는 그렇게 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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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 하얀 백지장을 닮은 막막한 동시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설레임을 맛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여기 설레임 -> 설렘

    원래 설렘이 맞는 단어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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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라는 규칙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높을 벽을

    높을 -> 높은

    오타가 많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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