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1일 화요일

(in)visible: 보여 지는 것 너머_토토

(in)visible: 보여 지는 것 너머

1. Prologue

만화책이나 영화 같은 데 보면 항상 신비스러운 캐릭터가 나온다. 학교에서는 존재감도 없고 평범하지만 사실 다른 곳에 가서는, 혹은 자기 방안에 있을 때는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 나는 그런 캐릭터이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대단한 것이 없었다. 잘하는 것이 많고 싶었는데 모든 걸 적당히 하다보니까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내 캐릭터가 서서히 무너져갈 때쯤 아빠가 6mm 비디오카메라를 쥐어주면서 하자에 가서 영상을 배워보라고 했다. 비디오카메라와 영상 그리고 하자는 아무것도 없던 나에게 그 뭔가 대단한 것 같았다.

영국에 있을 때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다. 아마도 지나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와 평범한 2층 집에서 사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서였던 것 같다. 길을 걸어갈 때도, 학교를 돌아다닐 때도 배경에 전혀 묻히지 않고 존재감이 너무 확실한 내가 너무 싫었다. 튀지 않고 적당한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격도 너무 조용하지도 않고 떠들썩하지도 않게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평범한 척 하면서 4년을 보냈고 한국에 돌아왔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애들 사이에서 나는 그렇게 바라던 대로 전혀 튀지 않았고 존재감도 없었다. 영어시간만 아니면 그랬다. 영국에서 편입 왔다는 얘기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별명이 ‘영국’이었고 영어 선생님은 날 괴롭히는 걸 좋아했다. 매번 영어지문을 읽으라고 시켜서 3학년 때는 한국 발음을 터득해 콩글리시로 읽었다. 영국에서는 평범한 애가 되고 싶어서 영어를 배웠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에 오니까 영어 때문에 튀는 애가 되어버렸다.

2. 문을 열고 스크린 앞에 서다

길찾기 시절은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말 할게 없을 정도로 남들에게 묻혀서 지냈다. 노리단, 합창, 나를 찾아가는 여행 등 별로 관심이 안가는 프로젝트들을 최대한 눈에 안 뛰게 참여하면서 한 편으론 빨리 주니어가 되서 영상방에 들어가길 바랐다. 길찾기 과정을 마무리하는 담임들과의 평가 테이블에서 귀는 우리 엄마에게 “토토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한데 사실 토토가 저희 반인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그 만큼 걱정 안 끼치고 자기가 할 일은 알아서 다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라고 말했었다.

존재감이 없으려면 우선 남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자기 할일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줄 알아야 하고 남 일에 참견해서도 안 된다. 나는 누구에게 다가가지도 다가오게 하지도 않으면서 그 경계에서 늘 무관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니어가 되고 캐치스코프라는 영상팀에 합류했다. 허브, 유란, 뿡, 베이, 나캉, 름사, 나마, 보라, 제이미, 케이 그리고 판돌 유리를 만났다. 혼자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갑자기 동료 작업자라며 다가온 이 많은 사람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걱정 안 끼치고 할 일은 알아서 다 하던 길찾기 시절의 토토는 나이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굉장히 작게 느껴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떨리는 내 목소리가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질문을 계속 회피할 수만은 없었다. 캐치스코프의 영상작업은 내가 미지근하게 참여하면 전체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도움은 못 줄지도 모르지만 방해는 되지 말자”가 나의 신조였지만 마음 속 깊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하지만 이 마음에 대한 동기는 지금까지에 비해 사뭇 달랐다. 자존심이 아니라 다른 캐치스코프들에게 인정받고 그들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태껏 나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 내가 존재감 없이 있으면 걱정해주고, 끊임없이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라고 손짓하는 사람들이었다.

길찾기 때와는 달리 나의 칼퇴근은 점점 줄어갔고 하자의 107호 영상방은 내 방보다 흥미로운 곳이 되었다. 영상에 비범한 잠재력이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캐치스코프와 Focus On: Interview 프로젝트를 하면서 영상은 노력한 만큼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인터뷰이였던 이언희 감독을 내가 진심으로 사모해야지 관객들도 그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달 정도의 작업 기간을 거쳐 인터뷰 프로젝트는 완성되었고 11월부터 첫 개인 작업을 시작했다.

막상 개인 작업은 시작하기에 앞서 두려웠다.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대신 얘기해주고 어려운 얘기를 쉽게 설명해주는 의지할 사람들이 없어진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동일하게 하고 싶은 얘기, 의견을 모아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얘기’,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었다. 내 얘기를 주제로 삼으라고 했을 때 처음 떠오른 것은 캐치스코프를 만나면서 겪은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혼자 웅얼거리고 하고 싶은 말을 남들의 무거운 시선에 눌려 끝까지 참고 버티던 내가 조금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 더 이상 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엄격한 규칙들 속에서 답답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한 발짝 나온다는 것은 내가 내 자신으로 부터 한 발짝 자유로워지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 내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숨고 싶어 하던 나의 모습이라고 해도.

같은 얘기여도 마이크를 잡고 말로 하는 것과 영상으로 만드는 것은 달랐다. 나를 돌아보고 분석하는 과정은 훨씬 길었고 내 영상을 볼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게 전달해야 했다. ‘내가 말을 했다’에 집중하고 있었던 나에게 듣는 사람을 고려하게 된 경험은 소중했고, 날 것으로 보여주기보다 내 의도를 살릴 수 있다는 영상의 특성에 매력을 느꼈다. 영상방에서의 첫 학기는 영상이 내 표현의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앞서서 내가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캐치스코프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3. 문 앞에서 만난 사람들

이제 막 내 안에 잠겨있던 문을 열고 나왔더니 그 앞엔 허브와 유란 그리고 새로 들어온 한결이 있었다. 유리와 다른 20대들은 나에게 10대 팀장을 해보라고 제안을 했다. 학교 다니면서도 한 번도 반장, 부반장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선거 같은 건 관심도 없었고,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 제안은 문을 열고 나왔다는 성취감에 빠져있던 나에게 문하나 연 걸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로 다가왔다. 허브와 유란과 내가 처음 영상방에 들어왔을 때 각각 너무 다르고 친하지도 않아서 유리는 걱정되는 마음에 일부로 우리 셋을 묶어놓는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허토란’에서, 그리고 107호에서 나는 어떤 존재이고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길찾기때 자기가 맡은 일은 잘해오던 나는 더 이상 나 혼자만 잘하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됐다. 같이 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내가 만약 좀 일찍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팀장이었을 때 내가 가장 자주 했던 건 과제 공지였을 거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독촉하려면 내가 이 말을 할 수 있게 과제를 먼저 끝내야 했다. 늦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선 내가 늦지 말아야 했다. 1학기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성실히 했다면 2학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자고 말하기 위해서 성실했다. 팀장은 전체를 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전체를 보려면 절대 자기 자신만의 문제에 빠져있으면 안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 나를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했다.

어떤 곳에 처음 와서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했는데, 내 경우를 되짚어 보면 캐치스코프에서 함께 영상을 만들면서 내 의견이 반영되는 것을 보았고, 나에게 기대를 걸어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었다. 사실 정확히 따져 보려면 처음 만나서 그 우물쭈물 거리던 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말 잘 못해도 “괜찮다”, “기다려 줄께”라고 말했던 사람들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첫 학기에 캐치스코프들이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주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팀장이었는데 그때서야 나도 팀의 일원이란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너와 내가 경쟁상대가 아니라 서로가 힘들 때 의지가 되어 주고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작업동료라는 것을. 팀, 코멘트 그룹, 동료 작업자 등의 이름 아래서 ‘간섭’과 ‘방해’같은 것은 더 이상 기분 나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내가 이런 것을 주도 하는 사람인 팀장이 되어갔다.

4. 배움과 실천을 동시에

나는 또 다시 새로운 학기를 맞이했고 3학기가 되었다. 내가 2학기였을 때 생긴 ‘길드하자’라는 모임은 주니어 3학기 이상의 죽돌들이 하자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체가 되면서 다른 죽돌들도 함께 이끌어 가고 싶은 마음이 모인 그룹이었다. 전 학기 때 길드 모임을 시작했던 뿡의 행적을 따라다니며 관찰하고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은 나는 당연히 참여하고 싶었다. 사실 새로 만든다는 게 더 정확했다. 뿡, 나르샤, 엽, 가람, 오드리 등 길드를 이끌어가던 죽돌들이 3학기를 마지막으로 수료를 해버렸고 자연스레, 3학기인 나는 말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주도적인 사람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107호 안에선 1년 동안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말해도, 많이 말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107호 밖으로 나가서 허브, 유란, 한결이 아닌 다른 50명의 죽돌들 사이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되는 건 쉽지 않았다. 원래 대인원에 대한 공포증도 있었고 “쟤 왜 나대” 라는 말은 더욱이 듣기 싫었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프리스쿨 때 우리는 무성영화를 만드는 미션을 받았다. 각본, 세트, 음악, 폴리, 촬영, 편집 등 모든 것을 우리 손에서 해결해야 했고, 시간은 3일 밖에 없었다. 지체할 시간 없이 빨리 시나리오를 써야 했는데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말 할까 말까 갈등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조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화장실 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3일 동안 영화 한 편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찍어야 하는데 진척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하루에도 수십 번 뿡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3학기가 뭐 길래. “3학기니까…….” 어쩌고 하는 말들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마음 같아선 나도 내빼고 누군가 앞에 나와 주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지난한 침묵 속에서 나는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3학기이니까”라는 말은 모두가 3학기가 되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요구사항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있고 보이는 것을 못 본 척하지 말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날 3학기들을 불러서 얘기를 했다.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상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우리가 먼저 앞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라고. 나 혼자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죽돌들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PD 역할을 맡았던 속눈썹, 음악과 폴리를 담당해준 공연팀의 왕양, 포디, 진, 환, 마니. 미술팀을 이끌어갔던 유메, 제이, 그림자. 편집의 유란, 조연출 허브, 촬영 한결.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 위치에서 다른 죽돌들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드디어 우린 영화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3학기가 되자 드디어 그 동안 내가 경험하고 받아들인 것들을 밖으로 내보여야 하는 시기가 왔다. 언제까지 좋은 것만 보고, 말하지 않으면서 듣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뿡이 떠난 시점이 바로 내가 밖으로 나올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없고, 때문에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할 수 없다. 내가 보이는 것만큼 행동하고, 차차 내게 닥쳐오는 것들을 부딪혀보면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배우고 있어요.“ 내지는 ‘아직’이란 단어를 붙여 말하는 모든 것들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배우는 시기, 행동하는 시기가 나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의견을 말하고, 주도하는 등의 역할을 해야 되는 때가 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시간을 유예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리스쿨을 계기로, 내가 유예하는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항상 불안할 것이라고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 할 거면서 한쪽으로 계속 조마조마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일단 부딪혀 보기로 결심했다.

프리스쿨의 경험을 빌어 3학기를 중심으로 길드가 구성되었다. 주니어 과정인 열린작업장의 변화와 함께 전체가 하나로 움직이는 프로젝트들이 많아졌고 나도 107호 밖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갔다. 107호 밖은 내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보니 내가 속해 있는 더 큰 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열린작업장이라는 팀에서는 팀원도 많았지만 팀을 이끌어가고 싶은 팀장들도 많았다. 괜히 처음 보는 대인원에 대해 겁을 먹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길드를 하면서 확실히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 나와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찾았고, 내가 나를 믿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줄 수 있게 된 것 같다.

5. 숨기고 싶은 것을 인정하기

영상을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내가 분명히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을 가지기 까지는 카메라를 다루는 법에서 부터 매 학기 한 편의 영상물을 만드는 것까지,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노력하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영어는 내가 선택해서 잘하게 된 것이 아니다. 우연히 어렸을 때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었고 특별히 영어가 좋아서, 언어가 좋아서가 아니라 적응해야 됐기 때문에 배울 수밖에 없었다.

일반학교를 다닐 때 영어를 잘한다는 것에서 받은 주목은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일단 사람들은 내가 유학을 갔다 왔다는 사실을 우리 집이 돈이 많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차라리 사실이었으면 했다. 둘째, 영어를 잘하면 똑똑하다? 모범생이다? 차라리 이것도 사실이었으면. 나는 학교에서 잠만 자고, 시험을 잘 보는 것도 영어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다른 애들은 나 때문에 영어 등수가 떨어진다며 불평했다. 자연히 중학교 3년 동안 이런 편견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는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하자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쫓아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한 번 영어밖에 못하는 애가 되긴 싫었다. 이런 나에게 글로비시에 대한 제안은 굉장히 고민되는 것이었다. 다른 죽돌들에게 영어 수업을 하라니…….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것, 하고 싶은 영상만 고집하고 다른 건 일체 안하겠다는 것도 이기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은 없었지만 영어에 도전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글로비시와 영어의 차이점, 글로벌 잉글리시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1년이 걸렸다. 하지만 계속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던 ‘영어’와 차별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불어나 일본어를 배울 때처럼, 글로비시를 새로운 언어라고 생각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나도 배우는 입장이 될 수 있었다.

하자에서 배우는 입장은 심리적으로 가르치는 입장보다 훨씬 쉽다. 내가 간절히 배우고 싶은 것만 있으면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책으로 공부할 수도 있고, 같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모임’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항상 ‘배우는 중’이기 때문에 누구도 나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얻어가는 것도 자연히 늘어난다. 하지만 반대로 가르치는 입장이 되는 것은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그것을 남들과 공유하길 선택했을 때는, 남의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도 해야 하며 다른 죽돌들이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 등을 고민하는 수업준비도 해야 한다.
글로비시 프로젝트는 이런 점에서 다르다. 예전엔 나 혼자 영어를 너무 쉽게 배운 것 같아서 또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괜히 칭찬을 받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글로 비시에서 나는 사실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고, 수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2년이 지난 지금, 글로비시 프로젝트에 도전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하자 투어를 영어로 해야 될 때 전날 잠을 설치지도 않으며, 즉흥적인 상황에서 통역하는 것도 마냥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내가 어딘가에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성취감을 준다. 성취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는 항상 묻어두고 싶은 장기였지만 글로비시를 하면서, 말하고, 쓰고, 읽는 것 뿐 만아니라 통역, 수업과 같은 다른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주목, 선택하지 않은 능력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지금도 수료에세이를 쓰는 동시에 다음 학기 글로비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무언가에 대한 공부가 끝없는 것처럼 공부의 교제를 만드는 글로비시 프로젝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끝이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 학기 더, 시니어로서 리사와 함께 글로비시 프로젝트를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6. 안과 밖의 경계 위에서

주니어 3학기 때 하자 마당에 컨테이너가 들어왔고 우리는 ‘컨테이너 어페어‘라는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작업하시거나 연구하시는 분들을 초대해서 특강을 듣거나 함께 토론을 하면서 도시에 관한 우리의 사유를 넓히고나 한 프로젝트였다. 가장 기대하기도 했었고, 인상 깊었던 강의는 [상계동 올림픽]을 만드신 다큐멘터리스트 김동원 감독님의 강의였다. 그때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닌 이야기를 다룰 때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어떻게 관점을 만들어나가나요?” 당시 우리에게도 한 가지 공통의 주제가 있었다. ‘Save My City’, 예전부터 도시에 대해 관심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이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선 자신만의 동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야했다. 김동원 감독님은 내 질문을 꿰뚫어 보셨던 것 같다. 굉장히 심플하게, “여러분이 어떤 것에 대한 영상을 찍던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지금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세요.”라고 하셨다.

Save my city는 주니어 과정의 모든 죽돌이 네 팀으로 나뉘어 서울이라는 도시와 그 근교의 신도시까지를 탐험하면서 현재 도시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과 이야기 거리를 작업화 해 보는 프로젝트였다. 도시는 내 짧은 인생의 대부분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지만 정작 이렇게 오래 관찰하며 걸어본 적은 없었다. 우리는 마치 서울에 처음 상경한 사람처럼 무리지어 다니며 눈에 띄는 것들은 모두 카메라에 저장했고 몸이 이끌리는 곳을 따라 무작정 걸어 다녔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처음 발견한 사람‘, 하지만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팀이 만든 [Wavy City]라는 영상물 속의 물고기가 도시 생활에 적응해버려서 깨끗한 물을 찾아도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당장 시골에 내려가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물고기는 우리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였다. 재개발이 되는 도시 한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것을 선동하는 사람도 아닌, 직접적인 피해자도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물고기라는 캐릭터를 통해, 뿌리 내릴 수 있는 곳에 대한 작은 소망과 미미한 영향이지만 우리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만약 ‘Wavy City’를 혼자 만들었으면 그렇게 부지런히 밖을 걸어 다니지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혼자 방안에 앉아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며 나의 정체성은 도대체 뭘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팀으로서 공통의 경험을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만들고 ‘모아야’ 했기 때문에 움직이면서 생각하길 택한 것이다. 도시, 또는 ‘밖’은 항상 있지만 내가 들여다보길 선택하지 않으면 항상 ‘안’과 ‘밖’으로 분리될 것이고 비록 도시에 살고 있지만 나는 유령 같은 존재일 것이다. 카메라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도구에서 밖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그렇게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을 때, 때론 한 발짝 떨어져 봐야 하고 때론 내가 카메라에 나올 정도로 가까이 갈 수 있어야 한다. rec을 눌렀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되는 것처럼 rec을 누르고 어딜 향해 비출 것인지 매 순간 스스로 판단 할 수 있는 자기 확신이 필요한 것 같다. 김동원 감독님이 12년 동안 비전향장기수 할아버지들과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완성한 [송환]처럼 나에게도 내 카메라를 들고 오랫동안 몰두 하고 싶은 주제가 있는지 고민하게 됐다. 12년을 정확히 약속할 수는 없지만 ‘도시’라는 주제를 계속 탐구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특징들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 말이다.

7. 세상을 넓혀준 카메라

주니어 4학기, Save My City 때의 작업을 이어가야겠다는 다짐으로 그림자와 함께 '999 City'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림자와 나는 이유는 달랐지만 각각 999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모티브 삼아 움직였다. 나에게 999는 119와 같은 숫자였다(영국에서는 119가 999이다) 따라서 ‘999 City’는 위기의 도시라는 의미였다. ‘기후변화시대를 직면한 창의적인 십대들’, ‘창의성 위기의 삶을 만나다’ 등, 특히 ‘위기’와 ‘시대’라는 단어를 많이 접한 학기였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위기라고 동의하던 동의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위기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위기를 마주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게 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한 곳을 정해 필드워크를 나갔다. 그림자는 공책과 펜을 들고, 나는 카메라로 기록을 했다. Save My City 때처럼 아이디어가 샘솟길 기대했던 걸까, 더 깊이 고민한다는 게 두려웠다고 해야 될까, 순식간에 몇 주가 흘러가고 창신동, 공덕동, 여의도, 문래동, 한강, 여러 곳을 다녔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내심 알고 있었듯이 이번 영상은 아이디어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고 보니 도시는 전혀 만만한 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내가 안 가본 곳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고 내 작은 발걸음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거대한 규모가 바로 도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창신동 곳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좁은 골목과 낡은 집들이 예쁘다며 사진을 찍어가는 사람들과 내가 다른 점은 뭘까. 나의 얘기를 할 것인가,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옳은 걸까.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을 마주쳤다. 이 질문들을 피해 카메라 뒤에 숨지 않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여태까지 내가 기록영상을 찍었을 때처럼 멀찍이 서서 관찰하고 아무런 편집도 하지 않고 테이프를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찰 한 것을 나만의 시선과 경험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영상을 통해 나를 보여준다는 것인데, 나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가? 줄에 발이 묶여 끌려가는 사람, 벌레가 무서워 이불 속에 숨는 사람, 자기 팔을 잘라 기계로 대체하는 사람, 빌딩들이 무너져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 999 city 작업에서 나는 네 명의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끌려가고, 숨고,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모두 내가 지양하는 것들이지만 돌이켜 보면 나 역시 종종 내 주변의 상황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불 속에 숨어도 벌레는 계속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내 주변의 일들을 보지 않길 선택하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인 희망이었던 것이다. 999 city를 완성하는 의미는, 더 이상 방안에서, 또 카메라 뒤에 숨어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내 주변과, 나 자신을 의식하며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현실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불편한 진실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남 일에 참견 하지 않고 살면 너도 나도 행복할 줄 알았는데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내가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누려왔던 편의는 지구 저쪽 편 어딘 가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거대한 도시,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지구상에서 나는 내 존재감의 위기를 느꼈던 것 같다. 계속 저만치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면 나는 정말로 없어질 것 같았다. 999 city라는 작업을 하는 것, 그리고 영상이라는 매체를 소유한 것은, 비록 내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더라도, 도시에 위치해 있고 거기서 무언가 얘기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나름의 움직임이었다. 내 몸을 크게 만들어 눈에 띄게 하지 않아도 ‘내가’ 있고 그런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매체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내가 움직이고 있다면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계속 움직이고 도시와 내 주변에 관한 영상을 만드는 것은 다만 내가 살아가는 것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사는 곳은 나 혼자 독점하는 방이 아니라 훨씬 더 넓고, 많은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의 화각도 차츰 넓어졌다. 내가 카메라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을 때와 같이, 내 영상을 보게 될 관객들과의 연결 지점 즉, 공감의 지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 나는 그 카메라를 들고 움직인다.

하자에서 나는 좋아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일을 만들어가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즐거웠고 그것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나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을 만들어가고 공부할 것이다. 어딜 가도 매번 유령이 되고 싶었던 나는 카메라를 잡기 위해,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고 2년 반 동안 땅에 붙어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처음에 그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기대했던 영상은 실제로 대단한 것이었다. 카메라를 척척 다루고 키보드를 휘저으며 편집을 할 수 있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넓게 생각할 수 있는 힘, 붙잡은 카메라를 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그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지난 2년 반 동안,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만들어 가며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 어디에 자리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공부하고 축적하는지를 인식하는 ’in‘과 들고 있는 카메라를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작업언어를 통해 나를 드러내는 'out'을 함께 배웠다. 들어가는 것이 있으면 나오는 것도 있다는 말은 참 이해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과정에서는 ’in‘과 ’out‘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버리는 함정에 빠지기도 쉬웠다. 내가 어딘가에 소속 되어 있다는 인식은, 적응이라는 명분아래 나를 억지로 그곳에 맞추게 할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접한 그럴 듯한 얘기를 한 치의 부정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이 말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뱉어내는 것들은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일 수 있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떤 것을 향하여 가고 있나,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나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근거가 나뿐만이 아닌 내가 보여주려 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감이 가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해서 공감을 얻고 싶지, 결론짓는 것에 치중해서 보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영상을 만들고 싶지 않다.

이제 나에게(in)visible: 보여 지는 것 너머

1. Prologue

만화책이나 영화 같은 데 보면 항상 신비스러운 캐릭터가 나온다. 학교에서는 존재감도 없고 평범하지만 사실 다른 곳에 가서는, 혹은 자기 방안에 있을 때는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 나는 그런 캐릭터이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대단한 것이 없었다. 잘하는 것이 많고 싶었는데 모든 걸 적당히 하다보니까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내 캐릭터가 서서히 무너져갈 때쯤 아빠가 6mm 비디오카메라를 쥐어주면서 하자에 가서 영상을 배워보라고 했다. 비디오카메라와 영상 그리고 하자는 아무것도 없던 나에게 그 뭔가 대단한 것 같았다.

영국에 있을 때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다. 아마도 지나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와 평범한 2층 집에서 사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서였던 것 같다. 길을 걸어갈 때도, 학교를 돌아다닐 때도 배경에 전혀 묻히지 않고 존재감이 너무 확실한 내가 너무 싫었다. 튀지 않고 적당한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격도 너무 조용하지도 않고 떠들썩하지도 않게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평범한 척 하면서 4년을 보냈고 한국에 돌아왔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애들 사이에서 나는 그렇게 바라던 대로 전혀 튀지 않았고 존재감도 없었다. 영어시간만 아니면 그랬다. 영국에서 편입 왔다는 얘기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별명이 ‘영국’이었고 영어 선생님은 날 괴롭히는 걸 좋아했다. 매번 영어지문을 읽으라고 시켜서 3학년 때는 한국 발음을 터득해 콩글리시로 읽었다. 영국에서는 평범한 애가 되고 싶어서 영어를 배웠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에 오니까 영어 때문에 튀는 애가 되어버렸다.

2. 문을 열고 스크린 앞에 서다

길찾기 시절은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말 할게 없을 정도로 남들에게 묻혀서 지냈다. 노리단, 합창, 나를 찾아가는 여행 등 별로 관심이 안가는 프로젝트들을 최대한 눈에 안 뛰게 참여하면서 한 편으론 빨리 주니어가 되서 영상방에 들어가길 바랐다. 길찾기 과정을 마무리하는 담임들과의 평가 테이블에서 귀는 우리 엄마에게 “토토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한데 사실 토토가 저희 반인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그 만큼 걱정 안 끼치고 자기가 할 일은 알아서 다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라고 말했었다.

존재감이 없으려면 우선 남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자기 할일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줄 알아야 하고 남 일에 참견해서도 안 된다. 나는 누구에게 다가가지도 다가오게 하지도 않으면서 그 경계에서 늘 무관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니어가 되고 캐치스코프라는 영상팀에 합류했다. 허브, 유란, 뿡, 베이, 나캉, 름사, 나마, 보라, 제이미, 케이 그리고 판돌 유리를 만났다. 혼자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갑자기 동료 작업자라며 다가온 이 많은 사람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걱정 안 끼치고 할 일은 알아서 다 하던 길찾기 시절의 토토는 나이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굉장히 작게 느껴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떨리는 내 목소리가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질문을 계속 회피할 수만은 없었다. 캐치스코프의 영상작업은 내가 미지근하게 참여하면 전체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도움은 못 줄지도 모르지만 방해는 되지 말자”가 나의 신조였지만 마음 속 깊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하지만 이 마음에 대한 동기는 지금까지에 비해 사뭇 달랐다. 자존심이 아니라 다른 캐치스코프들에게 인정받고 그들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태껏 나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 내가 존재감 없이 있으면 걱정해주고, 끊임없이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라고 손짓하는 사람들이었다.

길찾기 때와는 달리 나의 칼퇴근은 점점 줄어갔고 하자의 107호 영상방은 내 방보다 흥미로운 곳이 되었다. 영상에 비범한 잠재력이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캐치스코프와 Focus On: Interview 프로젝트를 하면서 영상은 노력한 만큼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인터뷰이였던 이언희 감독을 내가 진심으로 사모해야지 관객들도 그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달 정도의 작업 기간을 거쳐 인터뷰 프로젝트는 완성되었고 11월부터 첫 개인 작업을 시작했다.

막상 개인 작업은 시작하기에 앞서 두려웠다.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대신 얘기해주고 어려운 얘기를 쉽게 설명해주는 의지할 사람들이 없어진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동일하게 하고 싶은 얘기, 의견을 모아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얘기’,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었다. 내 얘기를 주제로 삼으라고 했을 때 처음 떠오른 것은 캐치스코프를 만나면서 겪은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혼자 웅얼거리고 하고 싶은 말을 남들의 무거운 시선에 눌려 끝까지 참고 버티던 내가 조금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 더 이상 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엄격한 규칙들 속에서 답답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한 발짝 나온다는 것은 내가 내 자신으로 부터 한 발짝 자유로워지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 내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숨고 싶어 하던 나의 모습이라고 해도.

같은 얘기여도 마이크를 잡고 말로 하는 것과 영상으로 만드는 것은 달랐다. 나를 돌아보고 분석하는 과정은 훨씬 길었고 내 영상을 볼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게 전달해야 했다. ‘내가 말을 했다’에 집중하고 있었던 나에게 듣는 사람을 고려하게 된 경험은 소중했고, 날 것으로 보여주기보다 내 의도를 살릴 수 있다는 영상의 특성에 매력을 느꼈다. 영상방에서의 첫 학기는 영상이 내 표현의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앞서서 내가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캐치스코프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3. 문 앞에서 만난 사람들

이제 막 내 안에 잠겨있던 문을 열고 나왔더니 그 앞엔 허브와 유란 그리고 새로 들어온 한결이 있었다. 유리와 다른 20대들은 나에게 10대 팀장을 해보라고 제안을 했다. 학교 다니면서도 한 번도 반장, 부반장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선거 같은 건 관심도 없었고,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 제안은 문을 열고 나왔다는 성취감에 빠져있던 나에게 문하나 연 걸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로 다가왔다. 허브와 유란과 내가 처음 영상방에 들어왔을 때 각각 너무 다르고 친하지도 않아서 유리는 걱정되는 마음에 일부로 우리 셋을 묶어놓는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허토란’에서, 그리고 107호에서 나는 어떤 존재이고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길찾기때 자기가 맡은 일은 잘해오던 나는 더 이상 나 혼자만 잘하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됐다. 같이 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내가 만약 좀 일찍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팀장이었을 때 내가 가장 자주 했던 건 과제 공지였을 거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독촉하려면 내가 이 말을 할 수 있게 과제를 먼저 끝내야 했다. 늦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선 내가 늦지 말아야 했다. 1학기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성실히 했다면 2학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자고 말하기 위해서 성실했다. 팀장은 전체를 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전체를 보려면 절대 자기 자신만의 문제에 빠져있으면 안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 나를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했다.

어떤 곳에 처음 와서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했는데, 내 경우를 되짚어 보면 캐치스코프에서 함께 영상을 만들면서 내 의견이 반영되는 것을 보았고, 나에게 기대를 걸어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었다. 사실 정확히 따져 보려면 처음 만나서 그 우물쭈물 거리던 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말 잘 못해도 “괜찮다”, “기다려 줄께”라고 말했던 사람들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첫 학기에 캐치스코프들이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주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팀장이었는데 그때서야 나도 팀의 일원이란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너와 내가 경쟁상대가 아니라 서로가 힘들 때 의지가 되어 주고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작업동료라는 것을. 팀, 코멘트 그룹, 동료 작업자 등의 이름 아래서 ‘간섭’과 ‘방해’같은 것은 더 이상 기분 나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내가 이런 것을 주도 하는 사람인 팀장이 되어갔다.

4. 배움과 실천을 동시에

나는 또 다시 새로운 학기를 맞이했고 3학기가 되었다. 내가 2학기였을 때 생긴 ‘길드하자’라는 모임은 주니어 3학기 이상의 죽돌들이 하자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체가 되면서 다른 죽돌들도 함께 이끌어 가고 싶은 마음이 모인 그룹이었다. 전 학기 때 길드 모임을 시작했던 뿡의 행적을 따라다니며 관찰하고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은 나는 당연히 참여하고 싶었다. 사실 새로 만든다는 게 더 정확했다. 뿡, 나르샤, 엽, 가람, 오드리 등 길드를 이끌어가던 죽돌들이 3학기를 마지막으로 수료를 해버렸고 자연스레, 3학기인 나는 말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주도적인 사람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107호 안에선 1년 동안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말해도, 많이 말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107호 밖으로 나가서 허브, 유란, 한결이 아닌 다른 50명의 죽돌들 사이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되는 건 쉽지 않았다. 원래 대인원에 대한 공포증도 있었고 “쟤 왜 나대” 라는 말은 더욱이 듣기 싫었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프리스쿨 때 우리는 무성영화를 만드는 미션을 받았다. 각본, 세트, 음악, 폴리, 촬영, 편집 등 모든 것을 우리 손에서 해결해야 했고, 시간은 3일 밖에 없었다. 지체할 시간 없이 빨리 시나리오를 써야 했는데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말 할까 말까 갈등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조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화장실 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3일 동안 영화 한 편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찍어야 하는데 진척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하루에도 수십 번 뿡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3학기가 뭐 길래. “3학기니까…….” 어쩌고 하는 말들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마음 같아선 나도 내빼고 누군가 앞에 나와 주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지난한 침묵 속에서 나는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3학기이니까”라는 말은 모두가 3학기가 되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요구사항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있고 보이는 것을 못 본 척하지 말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날 3학기들을 불러서 얘기를 했다.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상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우리가 먼저 앞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라고. 나 혼자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죽돌들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PD 역할을 맡았던 속눈썹, 음악과 폴리를 담당해준 공연팀의 왕양, 포디, 진, 환, 마니. 미술팀을 이끌어갔던 유메, 제이, 그림자. 편집의 유란, 조연출 허브, 촬영 한결.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 위치에서 다른 죽돌들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드디어 우린 영화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3학기가 되자 드디어 그 동안 내가 경험하고 받아들인 것들을 밖으로 내보여야 하는 시기가 왔다. 언제까지 좋은 것만 보고, 말하지 않으면서 듣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뿡이 떠난 시점이 바로 내가 밖으로 나올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없고, 때문에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할 수 없다. 내가 보이는 것만큼 행동하고, 차차 내게 닥쳐오는 것들을 부딪혀보면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배우고 있어요.“ 내지는 ‘아직’이란 단어를 붙여 말하는 모든 것들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배우는 시기, 행동하는 시기가 나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의견을 말하고, 주도하는 등의 역할을 해야 되는 때가 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시간을 유예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리스쿨을 계기로, 내가 유예하는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항상 불안할 것이라고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 할 거면서 한쪽으로 계속 조마조마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일단 부딪혀 보기로 결심했다.

프리스쿨의 경험을 빌어 3학기를 중심으로 길드가 구성되었다. 주니어 과정인 열린작업장의 변화와 함께 전체가 하나로 움직이는 프로젝트들이 많아졌고 나도 107호 밖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갔다. 107호 밖은 내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보니 내가 속해 있는 더 큰 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열린작업장이라는 팀에서는 팀원도 많았지만 팀을 이끌어가고 싶은 팀장들도 많았다. 괜히 처음 보는 대인원에 대해 겁을 먹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길드를 하면서 확실히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 나와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찾았고, 내가 나를 믿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줄 수 있게 된 것 같다.

5. 숨기고 싶은 것을 인정하기

영상을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내가 분명히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을 가지기 까지는 카메라를 다루는 법에서 부터 매 학기 한 편의 영상물을 만드는 것까지,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노력하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영어는 내가 선택해서 잘하게 된 것이 아니다. 우연히 어렸을 때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었고 특별히 영어가 좋아서, 언어가 좋아서가 아니라 적응해야 됐기 때문에 배울 수밖에 없었다.

일반학교를 다닐 때 영어를 잘한다는 것에서 받은 주목은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일단 사람들은 내가 유학을 갔다 왔다는 사실을 우리 집이 돈이 많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차라리 사실이었으면 했다. 둘째, 영어를 잘하면 똑똑하다? 모범생이다? 차라리 이것도 사실이었으면. 나는 학교에서 잠만 자고, 시험을 잘 보는 것도 영어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다른 애들은 나 때문에 영어 등수가 떨어진다며 불평했다. 자연히 중학교 3년 동안 이런 편견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는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하자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쫓아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한 번 영어밖에 못하는 애가 되긴 싫었다. 이런 나에게 글로비시에 대한 제안은 굉장히 고민되는 것이었다. 다른 죽돌들에게 영어 수업을 하라니…….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것, 하고 싶은 영상만 고집하고 다른 건 일체 안하겠다는 것도 이기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은 없었지만 영어에 도전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글로비시와 영어의 차이점, 글로벌 잉글리시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1년이 걸렸다. 하지만 계속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던 ‘영어’와 차별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불어나 일본어를 배울 때처럼, 글로비시를 새로운 언어라고 생각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나도 배우는 입장이 될 수 있었다.

하자에서 배우는 입장은 심리적으로 가르치는 입장보다 훨씬 쉽다. 내가 간절히 배우고 싶은 것만 있으면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책으로 공부할 수도 있고, 같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모임’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항상 ‘배우는 중’이기 때문에 누구도 나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얻어가는 것도 자연히 늘어난다. 하지만 반대로 가르치는 입장이 되는 것은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그것을 남들과 공유하길 선택했을 때는, 남의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도 해야 하며 다른 죽돌들이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 등을 고민하는 수업준비도 해야 한다.
글로비시 프로젝트는 이런 점에서 다르다. 예전엔 나 혼자 영어를 너무 쉽게 배운 것 같아서 또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괜히 칭찬을 받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글로 비시에서 나는 사실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고, 수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2년이 지난 지금, 글로비시 프로젝트에 도전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하자 투어를 영어로 해야 될 때 전날 잠을 설치지도 않으며, 즉흥적인 상황에서 통역하는 것도 마냥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내가 어딘가에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성취감을 준다. 성취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는 항상 묻어두고 싶은 장기였지만 글로비시를 하면서, 말하고, 쓰고, 읽는 것 뿐 만아니라 통역, 수업과 같은 다른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주목, 선택하지 않은 능력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지금도 수료에세이를 쓰는 동시에 다음 학기 글로비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무언가에 대한 공부가 끝없는 것처럼 공부의 교제를 만드는 글로비시 프로젝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끝이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 학기 더, 시니어로서 리사와 함께 글로비시 프로젝트를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6. 안과 밖의 경계 위에서

주니어 3학기 때 하자 마당에 컨테이너가 들어왔고 우리는 ‘컨테이너 어페어‘라는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작업하시거나 연구하시는 분들을 초대해서 특강을 듣거나 함께 토론을 하면서 도시에 관한 우리의 사유를 넓히고나 한 프로젝트였다. 가장 기대하기도 했었고, 인상 깊었던 강의는 [상계동 올림픽]을 만드신 다큐멘터리스트 김동원 감독님의 강의였다. 그때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닌 이야기를 다룰 때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어떻게 관점을 만들어나가나요?” 당시 우리에게도 한 가지 공통의 주제가 있었다. ‘Save My City’, 예전부터 도시에 대해 관심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이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선 자신만의 동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야했다. 김동원 감독님은 내 질문을 꿰뚫어 보셨던 것 같다. 굉장히 심플하게, “여러분이 어떤 것에 대한 영상을 찍던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지금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세요.”라고 하셨다.

Save my city는 주니어 과정의 모든 죽돌이 네 팀으로 나뉘어 서울이라는 도시와 그 근교의 신도시까지를 탐험하면서 현재 도시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과 이야기 거리를 작업화 해 보는 프로젝트였다. 도시는 내 짧은 인생의 대부분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지만 정작 이렇게 오래 관찰하며 걸어본 적은 없었다. 우리는 마치 서울에 처음 상경한 사람처럼 무리지어 다니며 눈에 띄는 것들은 모두 카메라에 저장했고 몸이 이끌리는 곳을 따라 무작정 걸어 다녔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처음 발견한 사람‘, 하지만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팀이 만든 [Wavy City]라는 영상물 속의 물고기가 도시 생활에 적응해버려서 깨끗한 물을 찾아도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당장 시골에 내려가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물고기는 우리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였다. 재개발이 되는 도시 한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것을 선동하는 사람도 아닌, 직접적인 피해자도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물고기라는 캐릭터를 통해, 뿌리 내릴 수 있는 곳에 대한 작은 소망과 미미한 영향이지만 우리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만약 ‘Wavy City’를 혼자 만들었으면 그렇게 부지런히 밖을 걸어 다니지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혼자 방안에 앉아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며 나의 정체성은 도대체 뭘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팀으로서 공통의 경험을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만들고 ‘모아야’ 했기 때문에 움직이면서 생각하길 택한 것이다. 도시, 또는 ‘밖’은 항상 있지만 내가 들여다보길 선택하지 않으면 항상 ‘안’과 ‘밖’으로 분리될 것이고 비록 도시에 살고 있지만 나는 유령 같은 존재일 것이다. 카메라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도구에서 밖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그렇게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을 때, 때론 한 발짝 떨어져 봐야 하고 때론 내가 카메라에 나올 정도로 가까이 갈 수 있어야 한다. rec을 눌렀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되는 것처럼 rec을 누르고 어딜 향해 비출 것인지 매 순간 스스로 판단 할 수 있는 자기 확신이 필요한 것 같다. 김동원 감독님이 12년 동안 비전향장기수 할아버지들과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완성한 [송환]처럼 나에게도 내 카메라를 들고 오랫동안 몰두 하고 싶은 주제가 있는지 고민하게 됐다. 12년을 정확히 약속할 수는 없지만 ‘도시’라는 주제를 계속 탐구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특징들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 말이다.

7. 세상을 넓혀준 카메라

주니어 4학기, Save My City 때의 작업을 이어가야겠다는 다짐으로 그림자와 함께 '999 City'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림자와 나는 이유는 달랐지만 각각 999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모티브 삼아 움직였다. 나에게 999는 119와 같은 숫자였다(영국에서는 119가 999이다) 따라서 ‘999 City’는 위기의 도시라는 의미였다. ‘기후변화시대를 직면한 창의적인 십대들’, ‘창의성 위기의 삶을 만나다’ 등, 특히 ‘위기’와 ‘시대’라는 단어를 많이 접한 학기였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위기라고 동의하던 동의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위기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위기를 마주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게 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한 곳을 정해 필드워크를 나갔다. 그림자는 공책과 펜을 들고, 나는 카메라로 기록을 했다. Save My City 때처럼 아이디어가 샘솟길 기대했던 걸까, 더 깊이 고민한다는 게 두려웠다고 해야 될까, 순식간에 몇 주가 흘러가고 창신동, 공덕동, 여의도, 문래동, 한강, 여러 곳을 다녔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내심 알고 있었듯이 이번 영상은 아이디어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고 보니 도시는 전혀 만만한 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내가 안 가본 곳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고 내 작은 발걸음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거대한 규모가 바로 도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창신동 곳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좁은 골목과 낡은 집들이 예쁘다며 사진을 찍어가는 사람들과 내가 다른 점은 뭘까. 나의 얘기를 할 것인가,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옳은 걸까.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을 마주쳤다. 이 질문들을 피해 카메라 뒤에 숨지 않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여태까지 내가 기록영상을 찍었을 때처럼 멀찍이 서서 관찰하고 아무런 편집도 하지 않고 테이프를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찰 한 것을 나만의 시선과 경험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영상을 통해 나를 보여준다는 것인데, 나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가? 줄에 발이 묶여 끌려가는 사람, 벌레가 무서워 이불 속에 숨는 사람, 자기 팔을 잘라 기계로 대체하는 사람, 빌딩들이 무너져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 999 city 작업에서 나는 네 명의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끌려가고, 숨고,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모두 내가 지양하는 것들이지만 돌이켜 보면 나 역시 종종 내 주변의 상황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불 속에 숨어도 벌레는 계속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내 주변의 일들을 보지 않길 선택하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인 희망이었던 것이다. 999 city를 완성하는 의미는, 더 이상 방안에서, 또 카메라 뒤에 숨어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내 주변과, 나 자신을 의식하며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현실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불편한 진실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남 일에 참견 하지 않고 살면 너도 나도 행복할 줄 알았는데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내가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누려왔던 편의는 지구 저쪽 편 어딘 가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거대한 도시,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지구상에서 나는 내 존재감의 위기를 느꼈던 것 같다. 계속 저만치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면 나는 정말로 없어질 것 같았다. 999 city라는 작업을 하는 것, 그리고 영상이라는 매체를 소유한 것은, 비록 내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더라도, 도시에 위치해 있고 거기서 무언가 얘기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나름의 움직임이었다. 내 몸을 크게 만들어 눈에 띄게 하지 않아도 ‘내가’ 있고 그런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매체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내가 움직이고 있다면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계속 움직이고 도시와 내 주변에 관한 영상을 만드는 것은 다만 내가 살아가는 것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사는 곳은 나 혼자 독점하는 방이 아니라 훨씬 더 넓고, 많은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의 화각도 차츰 넓어졌다. 내가 카메라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을 때와 같이, 내 영상을 보게 될 관객들과의 연결 지점 즉, 공감의 지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 나는 그 카메라를 들고 움직인다.

하자에서 나는 좋아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일을 만들어가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즐거웠고 그것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나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을 만들어가고 공부할 것이다. 어딜 가도 매번 유령이 되고 싶었던 나는 카메라를 잡기 위해,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고 2년 반 동안 땅에 붙어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처음에 그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기대했던 영상은 실제로 대단한 것이었다. 카메라를 척척 다루고 키보드를 휘저으며 편집을 할 수 있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넓게 생각할 수 있는 힘, 붙잡은 카메라를 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그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지난 2년 반 동안,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만들어 가며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 어디에 자리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공부하고 축적하는지를 인식하는 ’in‘과 들고 있는 카메라를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작업언어를 통해 나를 드러내는 'out'을 함께 배웠다. 들어가는 것이 있으면 나오는 것도 있다는 말은 참 이해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과정에서는 ’in‘과 ’out‘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버리는 함정에 빠지기도 쉬웠다. 내가 어딘가에 소속 되어 있다는 인식은, 적응이라는 명분아래 나를 억지로 그곳에 맞추게 할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접한 그럴 듯한 얘기를 한 치의 부정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이 말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뱉어내는 것들은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일 수 있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떤 것을 향하여 가고 있나,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나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근거가 나뿐만이 아닌 내가 보여주려 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감이 가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해서 공감을 얻고 싶지, 결론짓는 것에 치중해서 보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영상을 만들고 싶지 않다.

이제 나에게 영상은, 설령 내가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매체이다. 내가 알고 있는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보여 지는 것 너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매체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보는 것 너머로, 내 주변과 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집중과 관심을 나에게로 향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보고 해석한 것을 영상으로 만들어 내어 그것을 타인들과 나누고 싶다. 나는 카메라를 매체로 가진 사람이지, 그저 카메라 앞에만 서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주니어 과정의 수료를 기점으로 이제 나는 내가 2년 반 동안 몸담았던 곳에서 자립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을 떠났다고 해서 계속 어떤 곳에 대한 소속을 갈구하고 싶진 않다. 내가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어디에 소속되건 소속되지 않건 간에 나로 부터 출발하는 공부를 지속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상은, 설령 내가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매체이다. 내가 알고 있는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보여 지는 것 너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매체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보는 것 너머로, 내 주변과 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집중과 관심을 나에게로 향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보고 해석한 것을 영상으로 만들어 내어 그것을 타인들과 나누고 싶다. 나는 카메라를 매체로 가진 사람이지, 그저 카메라 앞에만 서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주니어 과정의 수료를 기점으로 이제 나는 내가 2년 반 동안 몸담았던 곳에서 자립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을 떠났다고 해서 계속 어떤 곳에 대한 소속을 갈구하고 싶진 않다. 내가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어디에 소속되건 소속되지 않건 간에 나로 부터 출발하는 공부를 지속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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