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1일 화요일

999를 이루는 구백구십구개의 수_그림자

제목: 999를 이루는 구백 구십 구개의 수

[9 이전의 숫자들]

2007년 여름. 우선 검정고시를 끝장내 버렸다. 점수에 대한 욕심 보다는 어서 해치우겠다는 생각이 더 커서 겨우 붙었지만 평균이 90점대이든 60점대이든 합격증서는 모두 똑같이 생겼으니까 괜찮았다. 당시에는 16살에 중학교 검정고시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모두 끝냈으니 읽고 쓰고 외우는 식의 공부는 이제 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곧 하자작업장학교에 지원을 할 생각이었다. 왠지 하자에서는 앉아있을 틈도 없이 엄청난 작업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얼마 뒤 작업장학교 입학전형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예비학교에 참가하러 가는데 하필 버스가 신호를 너무 잘 지켜서 첫날 3분정도 늦어버렸다. 숨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모르는 사람들 속에 끼어 있으려니 불편했다.. 원래 처음부터 아는 사람은 없다지만 그래도 불편했다. 가기 전까지만 해도 얼른 하자에 가고 싶었는데 이제는 얼른 예비학교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자꾸 신경 쓰이니까 말도 행동도 자연스럽게 나올 리 없었고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얼굴엔 벌겋게 열이 올라왔다. 예비학교 마지막 날 개인별 쇼하자를 위해 뭘 할지 고민하다가 직접 만든 아트북을 보여줬는데 손과 손이 맞잡은 그림에 끈을 매달아놓고 내가 싫어하는 관계는 끊고 좋아하는 관계는 놓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문득 ‘왜 여기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구 후회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별로인 걸 하고 있으려니 너무 부끄럽고 그만 둬 버리고 싶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창피해서 결국 무대에서 ‘아이씨’ 라는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집에 오자마자 그 아트북을 꽉꽉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 말았다.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까지 ‘계속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감정이 떠나질 않아서 속으로 조금 앓았었다. 앞으로 창피한 일을 하지 말자는 다짐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창피한 것을 일삼았던 길찾기 시절은 많이 기억나질 않는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매일 9시 15분에 와서 책을 읽거나 아침 모임 때 다 같이 지식채널e를 보기위해 빔 프로젝트를 설치해 놓았던 것, 길찾기 코스중 하나인 걸어서 바다까지를 할 때는 그 기간에 컴퓨터 못하는 게 가장 걱정이었는데 막상 가서는 잘 걷고 잘 떠들고 즐겁게 다녀왔던 것, 쇼하자 전날에는 멍석방 벽이랑 바닥에 테이핑 하고(이때부터 하자에서 테이핑을 실컷 했다.) 다른 것들도 준비 하느라 길찾기 되면 한 번씩 해본다는 밤샘도 해본 것 등이다. 친구네서 자는 외박이 아니라 학습공간에서 밤을 샌다는 게 마치 어떤 의식을 치루는 것 같아서 괜히 설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길찾기를 마치고 주니어로 올라와서 소속될 작업장을 정하는데, 다른 것도 생각해봤지만 뭔가 당연하다는 듯이 미술/디자인팀 TOT(Thoughtful eyes Of guerilla Teens)에 들어갔다. 물론 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담임은 세이랜 이었는데 작가와 대안학교 교사를 동시에 하시는 분이었다. 그것도 일주일에 한번 미술수업 하러 오는 게 아니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자에서 우리랑 만나고 다른데 강의도 가시고 작업도 하신다. 나는 일과 작업을 동시에 하는 게 신기했다. 왜냐면 보통 예술 하면 현실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예술이랑 일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포기해야 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TOT에는 이제 주니어 3학기 째를 맞이하는 원피스 마니아 오드리와 귀엽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유메랑 제이, 신발이랑 가방이 많은 센, 그리고 우리 언니 새삼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완전 낯설진 않았고 약간은 친숙하게 느껴졌다.

[한달음에 채우고 싶었던]

주니어 과정에, 그리고 tot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 작업은 영상팀과 같이 만든 Promotion Video wonder&wonder]다. 처음부터 같이 한 것은 아니었고 원래는 영상팀 <캐치스코프>랑 그림책 프로젝트 팀 <크레용물고기>가 같이 하는 것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나도 함께 하고 있었다.

캐치스코프와 TOT을 합치니까 인원이 꽤 많았다. 나는 속으로 회의할 때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불꽃 튀기는 장면 같은 것을 은근히 기대했다. 우리가 ‘같이’ 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이유 중에는 의견이 대립될 때 다른 사람과의 충돌을 겁나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컷기 때문이다. 그럴 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 궁금했던 건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어려운 점이 있었다. 각자 반응하는 속도가 다 달랐던 것 같다. 회의시간에 모두 진지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마주 앉았는데 막막해지고 별 말 없는 상황이 너무 어색해서 뭐라도 말하면 누군가 지적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얘깃거리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점점 p.v작업 내용보다는 회의 분위기에 더 신경 쓰고 서로 눈치 보니까 ‘이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 있는 건 뭐지, 왜 나는 좋은 의견을 빨리빨리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라며 필요 없는 원망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 영상 툴을 다루거나 캐릭터를 그리고 색칠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는데 ‘하자에서 우리가 만나서 뭘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 게 어려웠다. 구구절절이 담아서 보여줄 필요는 없지만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에 스토리에 대해 섬세하게 얘기할 필요는 있었다. 그게 잘 풀리지도 않고 자꾸 시간이 늘어지다 보니, 어느 날 모두 지쳐버렸다. 그 날 낮부터 밤까지 내내 회의가 아닌 얘기를 했는데 다들 하겠다는 마음은 확실했다. 사실 그전까지 속으로 다른 사람들이 느리게 하는 건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라고 넘겨짚어서 판단했었지만 끝나고 집에 오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항상 긴장하고 조급한 성향이 있는데 예를 들면 한동안 아침에 집에서 학교 나올 때 무조건 8시 15분에 나와야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14분은 안되고 16분도 안 된다. 1분 차이로 일찍 도착하거나 늦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더 늦게 가도 안 늦는다는 것을 알고 8시 40분에 나왔지만 여전히 39분은 안되고 41분도 안 된다. 그래서 걸음도 빠른 편인데 한번은 언니랑 같이 밖에 나왔다가 내가 먼저 앞서가니까 화를 냈다. 난 그저 느린 게 답답해서 먼저 갔을 뿐이었는데 화를 내서 이해가 가질 않았었다.

p.v작업 할 때도 비슷하게 내 속도를 남들에게 강요한 적은 없지만 점점 늘어지는 게 답답해서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가늠하고 넘겨짚으면서 전체를 보기보단 내가 할 일을 제 시간에 해치우는데 급급해졌던 것 같다. 내가 느린 것을 못 참듯이 다른 사람도 빨리빨리 하는 게 맞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기다려 준다거나 쫒아간다는 생각보단 맞춰서 가는 게 여럿이 잘 모였을 때 나는 효과인 것 같다.

매번 해치워 버리면 머릿속에 있는 것이 제대로 옮겨지지 않아서 아깝기도 하고 그렇게 두려워하는 ‘제대로 한 게 없을 것 같아서’가 걱정되었다. 너무 남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흘러가는 시간에 쫒기기 보단 순간순간을 잘 보내는 것, 깊이 있고 꾸준히 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꾸 초조해지지만 결과만큼 과정도 중요하다는 말에 공감하듯이 속도에 연연하기보단 꼼꼼하게 조합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어쨌든 p.v는 더 미뤄지지 않고 학기 말에 맞춰서 끝이 났다. 쇼하자 기간에 상영회를 할 때, 내가 그린 캐릭터가 화면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며 역할을 가지고 팀의 일부가 된 것 같아 한껏 들떴지만, 히옥스의 날카로운 코멘트에 들떴던 마음은 가라앉았다. 우리가 만든 작품속의 내레이션이 끊임없이 좌절위에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이었다면, 히옥스의 코멘트는 그 좌절을 끝까지 밀어붙여 극복 해내는 노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그 때 정말 아차 싶었다. 나는 한 번도 어떤 어려움에 대해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몇 년, 몇십년 동안 끈질기게 해서 되게 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축약된 과정에 비해 많은 성과지만 결코 그 몇 년, 몇십년을 견뎌 내기만 한 게 아니라 마음 한구석 불안함을 안고도 치열하게 살아온 것이다. 날개가 없으면 헤엄칠 수도 있고 걸어갈 수도 있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날개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끈질기게’라는 말이 확신 없이 무겁게 느껴져서 끈질기지 않아도 되는 기발한 대안을 마련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코멘트를 듣고 보니 혹시 내가 대안학교에 온 것도 일반학교를 빗겨가기 위한 ’대안‘ 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약 중학교를 끝까지 다녔다면 어땠을까? 어떤 때는 결단력이 되다가 회피가 되고, 끈기가 되다가도 질질 끄는 게 되서, 사실 나는 어떤 때에 결단력 있게 하는 게 좋고 끝까지 하는 게 좋은지 잘 모르겠다.

내가 아쉬웠다고 느낀 점도 있었다. 우리 작업에선 세 명의 등장인물이 각자 다른 곳에 있다가 우연히 한곳에서 만나 ‘같이’ 무엇을 하게 되는 이야기였는데, 그러한 관계에 대한 것이다. 무조건 손을 잡으면 우리가 되고, 늘 너와 나사이가 얼마나 뜨거운지 차가운지 온도를 측정하고 간을 보는 것이 관계 맺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하자에서 누누이 강조 해 왔던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집착하고, p.v작업에서 역시 이런 관계에 대한 충분한 성찰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p.v 작업을 계기로 앞으로 그 다음 얘기를 해 나갈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조금 생겼다.

[하나씩 세어가며]

p.v작업이 끝나고 마지막에 내용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나는 왜 미술을 하려고 할까’라는 의문이 주니어 과정을 보내면서 자주 들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궁금하지도 않았던 건데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예전부터 좋아서 해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점점 그리면 그릴수록 내가 뭘 그리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하고 있으니까 계속 같은 곳에 맴도는 것 같았다. 분명 내가 모르는 더 큰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다.

작년에 학기 시작 전 프리스쿨 기간에 세이랜이랑 전시를 갔는데 처음 듣는 두 명의 한국작가와 한명의 독일 작가였다. 근처에서 하는 다른 전시도 갔는데, 어떤 그림을 보고 세이랜이 뭐 같냐고 물어봤다. 어떻게 말해야 잘 말하는 걸까 생각해봤는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래도 뭐라도 말하고 싶어서 ‘꽃게랑 같아요..’ 라고 했다. 곧바로 대답 안하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정말 그걸 보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그 날 세이랜이 앤디 워홀 얘기도 해주셨는데 세이랜이 얘기하는걸 보면 틀림없이 여자 작가일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까 전혀 다른 작가였다. 예전부터 미술에 관심 있다고 말해놓고선 17살이 되서야 ‘현대미술’ 이라는 말도 처음 듣고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전시 외에 전시도 처음 가보고 글 쓰는 사람만 ‘작가’ 인줄 알았는데 예술 하는 사람들도 작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현재 활동하는 작가들이 그렇게 많은 줄도 몰랐다. 미술 하면 제일먼저 생각나버리는 이젤 앞에 앉은 화가의 이미지가 몇 일만에 한꺼번에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이후에 세이랜이 갤러리에 자신의 침대를 통째로 들고 온 트레이시 에민, 사고로 허리를 크게 다친 뒤 자신의 고통을 그리며 치유해나간 프리다 칼로에 대해 얘기해주셨는데 그녀들은 아주 사적인 얘기를 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단순히 갤러리에 놓여 있는 것을 넘어서 보는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감동을 주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현대 미술의 공통점은 다양하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지만, 많은 예술작품은 정지된 상태로 있지 않다. 작품이 전시되기까지의 과정도 중요해졌는데 나도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면서 과정이 보이는 작업을 하고 싶다.

그 다음 학기 말에 한 save my city-'wavy city' 애니메이션 역시 공동작업 이였는데 딱히 내 시선이나 화두를 못 찾아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를 때 ’나의 도시를 지켜줘‘ 라는 약간은 구체적인 주제가 주어졌던 게 좋았다. 처음엔 같은 팀끼리 한다고 해서 우리끼리 하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는데 나중엔 작업장별로 따로 하지 않고 다 섞어서 동서남북 중에서 들어가고 싶은 팀을 골라서 들어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서 팀이 되었다. 결과물은 영상으로 나오지만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건 다양했다. 우리는 물고기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원래 살던 곳이 없어지고 변하면서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몸도 같이 변해가지만 살던 곳이 없어졌기 때문에 도시 안에서 자신이 살 수 있는 곳을 계속 찾아다녀야 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서 ’재개발‘ 같은 직접적인 단어가 들어가진 않았고 결론이 나는 전개보다는 여전히 그 상황에 ’놓여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일주일이라는 기간은 짧긴 했지만 대신 중간에 늘어지는 게 없었다. 그리고 지난번보다는 내용에 대해 집중해서 생각하고 실제로 그게 반영되기도 해서 좋았다. 우리 팀은 주말 내내 답사를 갔었는데, 마침 밥을 먹었던 식당주인 할아버지가 재개발 추진위원회이기도 했고 우연히 우리 작업을 관통하는 소재가 되는 물 그림이 걸려진 동네를 찾기도 했다. 우리가 구상한 이야기가 실제로 맞닿는 부분이 있는 걸 보면서 완전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기뻤다.

짧았지만 인상 깊었던 'save my city'‘는 도시에 대해 관심을 갖는 동기가 되었는데 내가 도시라는 주제를 흥미롭고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티브이나 컴퓨터를 통해 보며 평가하고, 분석하고, 따져보고, 문제의식을 갖고, 댓글을 달고 어떤 식으로든 발언을 해도 결국 나는 어느 작은 집 방안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뿐이라는 게 어느 날 확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판타지를 갖는 게 불편한 이유는 굳이 허구와 현실 두개로 나눌 필요는 없지만 그 사이가 벌어져서 내가 허구가 되거나 허구를 만들어 낼수록 현실이 멀리 가는 게 싫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있는 현실이란 무엇일까. 허구가 왠지 이상적일 것 같고 현실은 시궁창일 것 같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너무 미화시키거나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기로 하고, 실제로 내가 느끼는 어디에도 있지 못하는 것 같은 불편한 위치와, 도시 안에 놓여있고 싶은 것에 대해 개인 작업을 시작했다. 그동안의 작업이 ’우리 작업‘이었다면 이번엔 ’내 작업‘이었는데 전처럼 즐겁고 재밌지만은 않았다.

작업 초반에는 도시에 대한 영상작업을 하는 토토랑 같이 탐사를 다녔다. 서울 몇 군데를 돌아다니다 보면 뭔가 관심을 확 끄는 게 보일 것 같아서 무작정 나왔는데, 막상 나오니까 무엇을 집중해서 볼 것인지 정하지 못해서 매번 보는 건물들 모습이나 위에서 내려다볼 때 펼쳐지는 도시 풍경을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종종 재개발 하는 곳도 지나갔는데 구경하듯이 보고 가는 것 같아서 스스로 이상하게 느껴졌다. ‘구경하는 위치’에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하자에서 자기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엄청 많이 들었다. 시선은 나 자체가 독립적으로 만들어지기보다 놓여있는 상황, 환경을 파악 했을 때 함께 만들어지는 것 같다.

학기 말에는 그동안 그린 이미지들을 모아 ‘opacity’라는 책과 설치작업을 했다. 책에는 내가 그린 이미지에 기름종이로 뽑은 사람을 겹쳐 놓았는데, 기름종이는 투명하지만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불투명도가 0이 아닌 이상 아무리 낮아도 실제로 존재한다. 내가 겉도는 느낌을 받아도 그건 내 몸이 투명해서가 아니라 내가 놓여있는 곳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겉돌고 불편한 위치에 대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은 포착했지만 고민한 내용에 비해 집요하게 끌어내지는 못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까지만 한 게 아쉽다. 느낌을 뒷받침해주는 당위성, 근거를 보여줄 수 있어야 설득력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작업이 되는 것 같다.

하자에서 여러 작업들 하고 전시 다니고 이야기도 들으면서 얻은 질문은

1. 미술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2. 두 공간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면 하나를 다른 하나로 환원시키지 않고 어떻게 서로 만날 수 있는가?

3. 구체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폭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4. 전시장에 작품을 거는 것이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5. 그럴 수 있는 믿음을 주는 작품은 어떤 것이며 그런 전시는 어떤 전시인가?

(버려진 공간, 분열된 시각: 미술이 도시 현실에 개입하는 몇 가지 방식_조선령_미술평론가_<6페이지>2009.6.15 대안공간 풀 발행) 이다.

요즘은 특히 1번이랑 4번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는데 현실의 공간에 사는 우리에게 미술이 무능력하거나 판타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미지가 화면 밖을 튀어나와 거리로 뛰쳐나갈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질문하거나, 메시지를 던지거나, 마음을 움직이거나, 폭력적이기도 하는 등 영향을 줄 수는 있다.

하자에서는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엄청 많이 한다. 영화 한 편을 봐도 ‘우리가 왜 지금 이 영화를 봤을까?’라는 질문을 하고,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엔 ‘2009년 너는 왜 그 작업을 하고 있는지’ 물어본다. 인문학 주제였던 ‘애전별친愛錢別親’에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가 겪는 것이고 마침 일어나는 일들과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지 탐구생활 시간에는 어떤 법칙이나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적 상황이나 재료, 당시 유행했던 사상을 따라 이미지를 읽어보았다. 그 시간에 자신에게 매체가 무엇인지 질문을 했는데 나에게는 현실 안에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학기 중에 그린디자이너 양지윤씨가 하자에 오셔서 ‘greening’ 워크숍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뭇가지가 그려진 조그만 쪽지에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약속들이 몇 개 적혀있고 그 중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을 골라 이름을 쓰고 나뭇가지에 손도장을 찍으면 나무 한 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말 작고 소소한 행위이지만 개개인이 정한 약속을 지키면 실천이 모여서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게 된다. 서밋 기간에 남산 드라마센터 앞이랑 광화문 동아일보 앞, 홍대 놀이터 앞에서 우리가 사람들을 상대로 greening을 했었는데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역시나 바닥에 깔아놓은 쪽지랑 나무가 그려진 천을 그냥 밟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뭔지 물어보면서 관심을 보이고 손도장도 찍고 갔다. 세상에서 나를 단절시키지 않고 여럿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매체에도 힘이 실리는 것 같다.

[늘 채워지지 않은 1에 대해]

내가 999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연히 보게 된 은하철도999라는 만화가 좋아서인데 나중엔 999의 의미를 알고 더 좋아졌다. 999는 1000이 되기 직전의수. 어른이 되기 직전의 시절이기도 하고 다른 세계로 가기 직전의 수이다. 1000에서 1이 ‘모자란’ 결핍된 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999는 어떻게 보면 1을 채워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버리기 직전에 있기 때문에 늘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기도 하다.

3년 과정의 중학교를 1년 만에 그만두고 나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끝까지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학교 안에 있을 때도 학교를 나왔을 때도 이도저도 아닌 것 같아 불안했다. 일반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진 못했다는 것도 슬펐다. 한 줄도 안 되는 수학문제를 두 줄 세 줄씩 술술 풀어내는 애들을 보면서 쟤네는 그냥해도 중간은 되던데 왜 나는 남들 다하는 것도 못하는지.. 속이 탔다. 그런 상황이면 독기가 생긴다던데 그렇다고 이를 갈며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다. 나아지고는 싶었는데 치열해지는 방법도 몰랐고 어떤 게 치열한건지도 몰랐다. 생각으로만 나아지고 싶어 하니까 실제론 달라지는 것 없이 대상없는 패배감과 열등감에 뒤엉켜서 화만 났던 것 같다. 내가 이러니 센척하고 예민하게 굴어도 좀 알아서 이해하고 위로해주길 바랬는데 현재에 대한 이유를 어떻게든 과거에서 끌어온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순간순간 기분만 오락가락 했다.

시간만 흘러간 먼 미래에 대해 추측하는 것으로 지금에 대해 안심하기에는 그것이 머릿속에서만 있는 허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것들에 대해 '나를 사랑하라', ‘나는 특별하다’ 같은 정말 말 뿐인 말은 위로는커녕 민망해지고 손발을 오그라들게 했다.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감정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면 끝도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객관적이고 때론 냉정하게 보는 자세도 필요한 것 같다. 여기저기 감정을 토하고 싶어질 때, 또는 그렇게 응석부리며 관심을 끄는 사람들을 종종 보면서 정말 자신을 지킨다는 것과 자존감이 뭔지를 질문 하게 된 곳은 여기, 하자에서였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내 10대의 가장 중요한 시절이라 할 수 있는 하자에서의 시간은 전환이라기보다 확장이라 하고 싶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점검하고 돌아보고 넘겨짚고 자가진단 내리는 것을 반복하지만 어디에 있어도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하자는 내가 선택한 학습의 공간이었다. 불안하고 막연한 감정들이 밀려와도 내 선택을 후회하거나 남에게 탓을 돌리는 것도 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학기를 지내고 수료라는 마무리 과정까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작업장학교라는 한 장소 안에 있던 시간들을 마무리 하지만, 이 역시 이후에도 지속되는 과정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늘 완결되지 않았던 지난 행보에 대한 위축된 마음을 상쇄시키기에도 충분하다. 999는 더 이상 부족한 어떤 것이 아니다. 구백 구십 구개의 수가 촘촘히 연결되어 쌓인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숫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