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적약진 十八歲的躍進
18세 十八歲
길찾기 프로젝트 중 '걸어서 바다까지' 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총 9박 10일, 영등포동에 위치한 하자센터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낙산에 있는 동해까지 가는 길찾기 필수 프로젝트다. 길찾기 과정을 경험했던 죽돌 중 많은 수가 이 프로젝트를 좋아한다. 생각 없이 걷기만 하면 '바다'라는 목적지에 도착해서인지, 바다가 좋아서인지, '새로운 시작' 할 수 있을 것 같은, 넓은 바다가 미래를 보여주기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좋아한 적이 없다. 걷는 동안, 발이 너무 아파서 어서 빨리 교통사고를 당해 안전차량을 타고 싶었다. 시작할 때 들뜨던 마음도, 같이 가던 사람도 걷다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어려웠다. 눈을 뜨면 바다이길 꿈꿨는데, 나는 뜨거운 도로 위에서 걷고 있었고 한달음에 내달려 숙소에 도착하고 싶었는데, 물집 투성이 발은 영 속도를 내지 못했다.
나는 9박10일이라는 날들을 생각 하며, 내가 경험한 주니어 과정을 생각한다. 느리게 걸었을 때도 있고 빠르게 걸었을 때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게 만들었던. 스스로와 판돌과 친구들의 도움을 생각한다. 3일을 걷다보면, 주변이 보이고 같이 있는 사람이 보인다. 힘들었던 것도 조금은 덜 힘들게 느껴지고, 무거운 가방도 이미 자연스러워져있다. 그렇게 3일을 되기까지 1년이 걸렸고, 바다에 도착한 9일째를 닮기까지, 2년 반이 걸렸다.
속도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걸바’에 관한 이야기로 글의 시작을 여는 것은, 하자에서의 2년 반은 한달음에 내달려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이미 많은 작업을 해본 사람처럼 멋있어지지도 않았고, 기막힌 영상물을 보여주며 우쭐할 수 있는 쇼하자도 아니었다. 늘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루하루가 '바다'와 같은 목표를 보여주고 이제 그 목표가 보인다.
아직 내 인생의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자 안에서 찾으려 했던 '바다'는 걷다보니 가까워져있었다.
출발선 出發線
처음 주니어 1학기가 되어 캐치스코프 란 영상팀에 참여해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Focus on interview project'였다. 관심 있는 직업인들을 선정하고, 팀을 나눠 인터뷰하는 프로젝트였다. 맨 처음 인터뷰 준비를 하던 김점선씨의 인터뷰가 취소되고, 나는 케이와 토토와 함께 이언희 감독의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현장에서의 지휘자가 되는 이언희 감독. 이언희 감독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렇게 가볼까 저렇게 가볼까 하지 않고, 열심히 하다보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했다. 결국 우리가 만날 수 없었던 김점선 씨 또한 매일 매일 그림을 그려야지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생활이고 일상이고 습관이었다고 들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언희 감독님에게 후광이 비췄다." 라고 느꼈고 그 후광을 본 사람은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 누구를 만나든 그분들에게 후광을 발견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만나려던 사람들 중 누구도 자신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었고, 각자의 길과 경로에서 그것을 삶에 녹여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깐 말이다.
그때까지도 내 고민 중 하나는 ‘난 왜 영상팀에 있는가,’였다. 영상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딱히 절실하게 하고 싶지도, 하기 싫은 것도 아닌 미지근한 채로,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뷰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야, 이 사람들이 얼마나 이곳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자리에 앉아 머리가 아프도록 회의하고 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107호가 좋았고, 같이 하는 사람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영상이 좋았기 때문이다.
미적지근하게 돌아다니던 나에게 유리가 "영상이 1순위가 되어라" 라고 했고,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리고 여기서 함께 영상이 즐거웠으면 하고 바랬다. 나는 전부를 바쳐야겠거니 싶었다. 길찾기 때부터 해온 적당히 회의에 참여, 작업하기, 관계 맺기 했었던 것이 아니라. 생활의 전부를, 만남의 전부를 혹은 인생의 전부를 여기에 쏟아부어야했다. 그래야만이, 절박하고 절실하게 이곳에 있을 것이고, 나의 미래에 이 사람들과, 영상과, 지금 생각들이 함께 이어질 테니까 하고 생각했다. 인터뷰 영상을 편집하며 길찾기 평가 테이블 이후 내 머릿속에 있던 "영상을 할 꺼야?" 란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대답은 "응" 이었다. 이제야 마음속의 1순위가 되어가는 것 같았고, 이왕 잡은 카메라 알 때까지 잡아보자 싶었기 때문이다.
독대 獨對
이제 바다를 향해가는 여행이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한 시작이 바로 '이것' 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은 떨리는 마음으로 신발 끈을 묶었다. 107호에서는 젠더감수성에 관한 주제로 매주 수요일 담임반 시간을 사용했었는데, 내가 바짝 당겨 묶어야 할 신발 끈은 그것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짧은 머리와 여성스럽지 않은 옷 스타일과 말투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에게 궁금증의 대상이었고, 매일같이 들려오는 질문에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여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울면 안 되었다. 자존심이 강해야 하고 고통을 잘 참으며, 감정표현을 하면 안 된다. 좋아하는 영화는 액션/SF/무림에 관한 이야기어야 하고, 동경하는 액션배우 한 명을 롤 모델로 삼는 것은 기본이었다. 무조건 실뜨기, 퀼트, 십자수같은 것은 좋아하면 안 되고 로봇, 축구, 스포츠를 좋아하고 잘해야 했다. 그게 남자였다. 사실 나는 액션영화보다는 드라마 영화를 보고, 자주 울고 감동하고 기뻐했었지만 '인형'보다는 로봇이 좋았고, 소꿉놀이보다는 칼싸움이나 축구를 좋아하는 어린 소녀였다. '여자'가 되고 싶었지만, 나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나밖에 없겠고, '남자'랑 비슷하니 더더욱 남자가 되겠다. 고 생각했다.
주니어 1학기, 첫 담임반 시간에, 우리는 '양성적 어린이 X이야기'를 읽었다. '양성적'이라는 말처럼, X라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아빠(아이와 놀아주기)와 엄마(집안일)의 역할을 바꿔하고, 남자색(파랑) 여자색(분홍) 같은 종류의 색이 아니라, 남여공용 모두 어울리는 색으로 된 옷을 사고, 전쟁놀이와 소꿉놀이 등, 사소한 놀이에서도 남/여 의 구분 없게 놀아야 했다. 이것은 여느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의 2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X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자신의 아이들이 X라는 이상한 아이와 친해지고, 자녀들의 성별이 더 이상 애매모호 하지 않길 바라던 학부모들은 양호선생님에게 '이 아이의 성별을 알려 주소' 하고 이야기하고, 검진을 다 마친 양호선생님은 2차 성징기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X는 하나의 성을 가지기 위해, 그때까지 가져왔던 그 어느 것도 포기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X의 이야기를 읽고 난 후, 나를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남자'나 '여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여자'가 되기 위해서, 지금까지 부정하던 나의 성질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나의 개인 쇼하자는 지난 4년간의 이야기가 담긴 [마주선 뒷모습]이라는 슬램 비디오였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2차 성징기가 되어선 가슴을 붕대로 묶고 머리를 더 짧게 자르고, 여성스럽다는 눈을 안경으로 가리면 남자가 될 줄 알았지만, 정작 '여자 같다'는 이야기를 더 들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늦은 밤, 혼자 길거리를 걸을 때 앞서가는 여자에게 '남자'같은 목소리와 형체로 위협주기 싫었다. 어떻게 해도 내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 4년간의 이야기를 짧은 영상 안에 담아보았다. 타인과 대화할 수 있는 영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관객들은 박수를 치고, 세이랜은 잘했다며 등을 쳐주었다. 이곳은 여성과 남성, 그것을 겉모습으로 나누지도, 성에 관한 역할을 정하지도 않는 동네라고 생각했다. 아니, 107호 뿐 아니라 하자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상은 내가 묻어두고 싶었던 그 뒷모습과 마주한다고, 뒷모습도 나였고 묻어두지 않은 채 걸어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변신 變身
주니어 4학기 에세이에 "공부는 엄청난 동기부여나 목적에서가 아니라, 어떤 부분이 궁금해서 이것을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 에서 시작하는 것" 이라는 문장을 썼다. 내가 하는 것을 항상 '잘한다, 못한다.' 라고 평가하며, 내가 세운 기준치를 달성하지 못하면 '못한다.'라고 이야기하는 내가, 앞서 그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한 번에 이뤄진 과정은 아니었다.
주니어 2학기 방학 프로젝트 중 Pink haja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Pink haja를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여름의 한복판이다. 분명 겨울에 진행된 프로젝트였고, 뜨거운 열기에 에어컨을 켜둔 기억은 없는데, 몸은 어쩔 줄 몰랐고 방은 더웠고 이야기는 뜨거웠다. 주제 토론이 진행되던 방에는 나처럼 성정체성에 관해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고, 연애관계에서 남/여의 위치와, 부모님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까 머릿속에서 생각하다가, 실제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을 보게 되니 '성'에 관해 고민하던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다. 라는 것을 알았다. 항상 영상방안에서 익숙한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하다, 낯설기만 한 사람들 앞에서 처음 이야기 해봤다. 겁냈던 것만큼, 격한 반응도 화난 사람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너는 그런 경험을 가졌구나." 라고 말해주었다.그렇지만, 이 순간에만 하자의 모든 사람이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관해 열려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Pink haja가 끝나고 나니, 여전히 나를 남자대하듯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동성애자라며 안 좋은 시선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커밍아웃 끝에 관계가 단절되는 상황도 있었다.
주니어 4학기를 계획하면서 '페미니즘 공부모임'(이하 공부모임) 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었다. 죽돌들의 참여가 우선이고, '여성의 힘이 강하다.', '여성주의에요~', 라는 말이 판돌들이 알려줘서가 아니라, 죽돌들 스스로 배우고 알게 되면서 말하길 바랬고, 제일 중요했던 건 '성'에 관한 것에 대한 '무지'를 보면서 더 이상 나 혼자 화내고 열 내고 성내면서 속 썩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모든 공부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페미니즘'은 지식 쌓기에는 편한 공부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민감한 주제로 다뤄져서인지, 지식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러면 안돼, 성차별이야' 라는 식의 것들이 머릿속에 몇 가지 있다. 그래서 자기경험과 연결되지 않은 지식들을 주로 얘기하기 쉬웠고, 그 지식들은 '우리가 이정도 알고 있다.' 라며 서로의 깊이를 알 수 있었지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로 연결되지는 않아 짧은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자기 경험과 연결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자기와 먼 얘기를 하면서 지식은 쌓여가겠지만 '성찰'은 없는 것이고, 결국 바른말만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는 우려가 있었다. 내가 지금껏 배운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선행된 후 나의 주변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이야기에 사로잡혀 남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변화하고 반응하고, 좀 더 넓은 세계를 보는 것이었다.
같은 학기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 세계를 뒤흔든 8명의 독일인] 이라는 프로젝트를 참여하던 중 받았던 과제가 생각난다. 모든 강의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난 8명을 돌아보며, 기억에 남은 키워드를 뽑고 그에 관한 짧은 소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8명의 인물과 관련된 키워드 중 가장 하고 싶은 키워드를 고르고 관련 자료를 읽고, 찾고, 정리하면서 책을 긁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이야기와 생각을 근거 있게 만들어보는 것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경험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것' 이라는, 동기화를 알게 되었고 진리 같은 여러 이야기를 녹여놓은 것에 감동하고, 그것에 대한 내 해석을 붙여보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변신'이라는 카프카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나의 의견에 관한 이유들을 찾아 '소논문'을 작성해 발표를 했는데, 그 때 카프카에 대해 강의하시던 강사님의 코멘트가 날카롭게 박혔다. 내가 하나하나 제시했던 이유들은, '갇힘'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예를 들어 변신의 마지막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죽어버린 것은, 카프카의 아버지가 항상 '벌레'라고 표현했던 카프카가 이젠,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주장하기에 앞서, 자기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식과 정보는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배워야할 것은 많고, 궁금증에 대해 매일 새로운 답을 내릴 수가 있다. 우리 같이 공부를 시작 해봐요' 라는 취지로 시작한 공부모임은, 공부를 함께 한다는 것은, 시작부터 함께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자기만의 '논문'을 써본 것처럼, 어떤 주제나 이야기에 관해 자기가 생각하고 그 생각을 단단하게 만들 '실례'나 이론들을 참고해야 하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과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부는 '함께'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진 躍進
마지막 주니어 4학기, 드디어 아무에게도 휩쓸리지 않고 내가 수료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랬을 때 나에게 가장 크게 정리해야 할 것은 '영상' 과 '페미니즘' 이었다. 2년 반 동안 계속해서 카메라를 잡고, 고민스럽게 만들었지만 공부모임의 시작이었던 '성정체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시선'을 신경 쓰게 된 것은. 그러나 나에게 다가올 모든 '시선'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생생하다. '시선'은 나에게 오는 질문들을 의미한다. 내가 누구와 사귀고 사랑하고, 내 성별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피하고 싶었고, 방으로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듣지 않고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배운 것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과, 적당한 관계 안에서 지내왔었지만 내가 바라는 친구도 나에 대한 이야기가 발전하는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작업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확실한 차이가 있더라, 적당히 하냐 열심히 하느냐의 사이 속에는. '거울' 이라고 말한 카메라를 들고, 그 이야기를 그려내려고 했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 내가 왜 이 영상을 만들고자 하는지에 관한 글을 인쇄하려했을 때, 선뜻 인쇄버튼을 누를 수 없던 것처럼 영상은 '인쇄' 버튼을 누르지 않은 나의 웅얼거림으로 끝나 버렸다. 웅얼거리기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도망쳤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누가 보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그럼 여기까지만" 이라는 생각으로, 결국 나만 아는 기호만 흩뿌려놓은 채 도망쳤었다.
그런데 도망치고 나니 정작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다. 모든 색이 섞여있어, 복잡하다면 복잡하고 단순하다면 단순한 나의 '방'은 더 이상 숨을 수 없었고, 사람들에게 이미 노출되어버렸었다. 노출되어도 다른 '방'을 만들어 숨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단순한 생각이 들었지만 방을 나오겠다고 했고, 어느 순간 '방'이 아닌 무서운 시선과 사람들에 둘러쌓인 '밖'에 있었었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검은방]의 상영회가 끝나고 난 뒤,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다.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단순하게 나의 경험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고, 느끼게 하기 위해선 '내 경험 뿐' 아니라 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경험 속에 갇히지 않고, 그 경험을 남과 함께 보기 위해선 '근거'와 '정보'와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삭제불가 削蹄不可
지난 2008년 8월, 캐치스코프는 도쿄슈레대학에서 진행된 도쿄슈레 국제 영상축제에 하자의 영상팀이었던, Visual rave가 제작한 'KTX : 300km 가 들려준 침묵과 함성'과 '고스트 걸즈'가 초청되어, 감독과의 대화를 하러 가게 되었다. 그리고 4박 5일간 일본에서 머물며 도쿄슈레대학에 재학 중이던 '메구미'에게 "카메라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 질문에 "가장 나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거울" 이라고 대답을 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나의 대답이 내 머릿속에서 오래 있었다.'거울' 로만으로 카메라를 들기엔, 카메라는 무겁고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니어 3학기, Save my city project로 공동 기획 및 연출한 '황금도시'가 상을 받고,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프로젝트 상 '황금도시'는 나 혼자서 연출하지 않았고, 모두가 함께 했지만 '대표'로 상을 받았다. 그 상을 수상실적으로 인정해 대학입시 특차/수시지원의 기회를 주는 대학들이 있었고, 아무 이상 없다면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생겼다. 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다. 그런데 그 희망이 사실은 불안했다. 과연 이것이 정당한 일인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길인지 선뜻 대답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니어 4학기를 마무리하면서도, 주니어 과정의 수료를 준비하는 8월을 보내면서도 확실하지 않았다. 2년 반 동안 손에 익었던 것을 놓아버리기엔 사라질 것 같아 무서웠고, 다른 선택의 폭이 뭐가 있을까 도저히 보이지 않았었다. 주니어 1학기 때부터 함께한 토토와 유란이는, 각각 시니어를 준비하고 영상 관련과의 입시를 준비한다고 했다. 나는 다가오는 시간들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에 마주하고 있다.
매번 사람들은 수료 준비한다고 말을 하면 "너 그럼 수료하고 나면 뭐할꺼야?" 라고 묻는다. 영상은 아니라고 대답하면 놀라는 얼굴과 함께, "그래 그게 좋을거야" 라고 위로 같은 대답을 한다. 나는 보다 구체적인 나의 확신이 필요했다. 영상을 하는 준비과정에서 '글'을 쓰고, 지난 도쿄슈레를 방문하고 '도쿄슈레방문기' 라는 글을 썼었다. 오히려 그렇게 글을 쓰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잘 전달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보는 경험을 했다. 대학에 가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유란이가 나에게 "그럼 글을 쓴다고 하고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뭐야?" 라고 물었다. 나는 우물거리다가 "여성학"이라고 대답했다.
영상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영상이 내 안에 사라질까봐 두려워했었던 것도, 폭이 없어보인다고 생각했던 것도, 대학에서 선택한 과가 평생의 나의 진로를 결정하리라 생각했었던 것도 맞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결정으로 영원토록 카메라를 잡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막막했었다. 확신 없는 내가 불안했고, 확신을 찾길 바랬다. 결정을 하는데 확신은 필요하다. 나는 확신 없던 나를 탓하며, 확신 없는 나를 밀어붙이는 사람 탓을 하기 싫었다.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었고, 확신 있는 것을 선택하고도 하게 되는 후회는 적어도 자책감으로 변하지 않았다.
다른 것이 아니라 '여성학'을 지금보다 더 공부해보고 싶다. 대학에서 '여성학'을 배운다면, 나는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 세이랜은 지레 겁주시며, 지금 하는 것처럼 배우진 않을지도, 배운 이야기보다 더 적은 이야기를 할지도, 꽤 보수적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아직 대학을 경험해보지 않았고, '생각의 뿌리'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처럼, 근본을 좀 더 탐구해보고 싶다.
하자에 처음 입학했을 때의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지금 하고 싶은 것이 다르고, 내가 지금 선택했다고 해서 '평생'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않는다. '평생'을 말하기엔, 아직 이른 감 있는 18살이다. 분명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한 것은 18년 중 '대단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이제야 18년을 살았고, 내 앞에는 18년의 몇 곱절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하자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한순간에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지 않았다. 나는 이제야 겨우 '바다'에 도착했을 뿐이다. 탈학교 했다고 해서,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고 내 삶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았고, 이제 그것을 해보려고 하는 참이다. 이제 시작일까? 아니 시작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가지기 위해, 나는 공부를 이미 시작했다. '왜 영상이 아니냐' 하는 가족들을 설득시키고, 막연하게 '이러면 좋겠다' 했던 것을 '하겠어'의 다짐으로 바꿔놓았다.
매번 '시작하겠다.'로 마무리 지었던 에세이처럼, 새롭고,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겠어, 라는 말로 숨지 않는다. 분명 새로운 것을 찾게 될 것이고,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알기엔 18세라는 나이는 너무 어리지 않은가. 그러나 단지 18년간일지라도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건 하나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계속 시작하고 끝나는 옴니버스 영화가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했고 끝나려면 18년보다 긴 시간이 남은 장편 영화다.
출발 出發
나에겐 11살짜리 동생 수진이가 있다. 수진이는 가끔 자기는 서울대에 들어가지 않으면 유학이나 가겠다고 이야기 한다. 내가 거기서 뭐하게? 라고 물으면 "글쎄.."라고 답한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물어본다. "언니는 대학 가서 뭐 할 꺼야?" 내가 "여성학" 이라고 말하자 수진이가 "그 후에 뭐 할 꺼야? 유명하지도 않잖아." 라고 툴툴거린다.
왠지 현실세계와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이는 만화책 보는 걸 즐기고 더구나 보편적인 가치체계와는 전혀 다른 가치를 제안하는 작업장학교 같은 곳에 있다 보니, 수진이가 나보다 더 현실적일지 모르는 생각이 든다. 대학 졸업 후엔, 당연히 취직이고 어떤 곳을 가야 좋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좋은 것인지 그 애가 나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론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초현실이고 판타지이고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하다보면 잘 사는 거겠지. 하는 종류의 자기최면이 충분히 가미된 허상들 말이다.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이 많아졌다. 멋있는 사람을 찾아,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변화하기 위해선 변화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능력과 멋은 겉모습만 따라가도 되지 않았고, 어떤 훈련을 며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만화책처럼 '한 달 후, 6개월 후, 1년 뒤' 와 같은 말로 나의 시간은 축약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있었기 때문에 한 달이 생겼다. 그리고 그 한 달이 쌓여서 한 학기가 지나고 수료를 하기 까지 지난 4학기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마주하고, 하루를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찾던 '바다'는 서울에서 강원도 같은 구체적인 거리도 아니고, 눈을 뜨면 닿아있을 곳도 아닌,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처럼 계속해서 걸어가면 닿을 곳이다. 걸어가며 아픈 것도, 힘든 것도, 같이 걷는 것도 알아가게 되고, 혼자의 속도에 집중도 해보는 것이다. 유리가 내게 주었던 고대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의 싯구 하나를 떠올린다.
“틀린 행동과 옳은 행동이라는 생각을 뛰어 넘는 곳이 있다. 거기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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