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일 수요일

펀치스트라이크_유란

펀치스트라이크

프롤로그 : 1회 초, 타석에 서서

가끔 중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아직도 내가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고 학력인증도 되지 않는 대안학교를 간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일반학교에서의 공부도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선생님이나 학우들과의 관계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 공교육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저항적인 생각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처음 대안학교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중학교를 입학 할 무렵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엄마에게 가 보면 어떻겠느냐 권유를 받았지만 그 때는 교복을 입고 싶은 마음에 절대 안 간다고 했다. 엄마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고 그렇게 중학교 3년을 문산여자중학교에서 보냈다. 3년을 공교육 속에서 살다보니 지겨운 감이 있었다. 그럴 무렵 다시 엄마가 대안학교 이야기를 꺼냈다. 꽤 괜찮은 성적표를 받고도 하자작업장학교에 지원했다. 단순히 '한 번 해 볼까?'에서 시작된 일탈은 지금 에세이를 쓰고 있는 내게 큰 변화를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길찾기 시절은 한숨밖에 안 나오는 나날이었다. 새로운 곳이겠거니 하는 점에서 흥미가 유발되었지만 공교육에서 하는 국영수 공부와 달리 너무나 생소하고 새로운 학습 내용과 방법들, 이를테면, 피아노나 리코더가 아닌 폐품으로 만든 악기를 친다거나 내 삶을 되돌아보는 방법의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내게 일종의 거부감을 가져다주었다. 다른 방법으로 이곳에 적응하려 했다. 친구들 만드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친구지 '무리'를 이루고 싶었다. 공교육에서는 그 것이 당연했으니까. 함께 놀고 함께 수다 떨면서 일상을 공유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곧 이들과 함께 학교를 안 나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길찾기 개인평가서에는 '아쉽다', '좀만 더', '앞으로는 이렇게' 같은 단어들이 태반이다. 이렇게 담임판돌인 귀의 걱정을 한 아름 안고 한 숨의 길찾기를 정리했다.

원-스트라이크: 영화, 새로운 매체를 손에 쥐고.

길찾기를 마치고 막 올라온 허브와 토토와 나에게 1학기는 새로운 것을 접하고 마냥 신기해하는 기간이었다. 비디오카메라는 물론이고 디지털 카메라도 많이 만져보지 못한 나에게 영상은 생각지도 못한 매체였다. 처음엔 글쓰기나 촌닭들을 추천받았는데 하기 싫다고 했다. 글을 엄청나게 잘 쓰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건방지게도 '글 쓰는 아이'로 낙점되기 싫었다. 방방 뛰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 보이기도 싫었다. 나도 진득하게 앉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영상방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캐치스코프가 되었다.

새로 온 길찾기들에게 내 소개를 "영상방 주니어 1학기 유란입니다." 라고 말했지만 아직 영상방은 낯설었다. 나는 어슬렁대고 있는 반면 같이 들어온 토토와 허브는 뭔가 꼼지락거리는 듯 보였다. 길찾기 때에 비해 훨씬 말도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고 달라진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 같았다. 그렇게 그들이 자리를 잡고자 노력할 때 나는 빠르게 적응하는 그들-내가 보기에-을 지켜만 봤다. 쭈뼛쭈뼛 거리며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와 쉽게 문을 열지 못한 나를 영상방 안으로 끌어온 건 20대 작업자 나캉이었다. 나캉은 내게 언니처럼, 동료처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일주일 내내 함께 저녁밥을 먹으면서 친해진 나캉을 비롯한 다른 캐치스코프들과 놀기도 같이하고 나아가 작업도 함께하게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기를 접한 후 비로소 나는 영상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내 목표는 영상방 안에 내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고 염원을 담아 '다음 학기에는 영상방에서 좀 더 쓰임 있는 죽돌이 되고 싶다'고 에세이에 적었다.

2학기가 되어 20대 작업자들은 거의 다 나가고 허브와 나와 토토는 주말영상학교를 하게 되었다. 겁이 났다. 나캉이 언니처럼 굉장히 살갑게 나를 챙겨주었던 반면 윤성과 원, 유리라는 엄청난 멘토들에게는 기대는 것이 어려웠다. '판돌'과 '죽돌'이라는 아직 생소한 단어와 관계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새로 들어온 한결과 남은 20대 작업자 름사, 새로 만난 영상학교 사람들과 함께 '카메라'를 공유할 수 있게 되어 조금은 편해졌다.

첫 단편영화 촬영을 앞두고 있을 때이다. 밤마다 화려한 스킬로 도배된 멋진 영상을 생각하며 잠들었지만 정작 맘에 드는 시나리오는 나오지 않았다. 쓰는 족족 '척'하는 내용들 뿐 이었고 그러다보니 결론이 없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첫 번째 시나리오가 무참히 깨지고 "진정 네가 잘 할 수 있고 가장 너에게 절실한 이야기를 해"라는 크리틱을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찾고 그 것을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숙제였다.

엄마와의 트러블은 1학기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었고 소소한 말다툼이 계속 되었다. 또래들에 비해 돈을 더 많이 쓰고, 화장하고 다니고, 귀가시간은 늦어져만 가는 나를 엄마는 점점 믿지 못한다고 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내내 우울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해" 라고 말한 뒤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으로 제일 나를 괴롭게 했던 '가족(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엄마와 나에 대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겪은 일을 바탕으로 써내려가니 생각보다 쉬웠다. 촬영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너무 술술 풀려서 불안했지만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이겠거니 하며 넘어갔다. 편집을 하면서 그 불안은 나타났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대로 늘어놓았는데 갈수록 앞뒤가 안 맞고 심지어는 이 내용이 내가 겪었던 일인가 싶었다.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뭔지 모르겠어서 또 힘들어했다. 영화란 실제를 그대로 옮겨놓는 작업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필요에 따라 처음과 끝을 바꾸어 버릴 수도 있고 몇 초 줄이는 것이 내용 자체를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겪은 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영화'라는 새로운 시공간에서 나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단순한 시간의 나열이 아닌 내 입장을 갖는 것이 중요했다.

예전부터 뭐든지 혼자 하는 것이 좋았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면 그만큼 부딪히는 것이 많아져 서로를 이해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내가 물러서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지는 것 같아 절대 그러기 싫었다. 적어도 영화를 찍기 전 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영화는 절대 혼자 찍을 수 없었다. 스태프, 연기자 등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만드는 것이 영화다. 그 안에서 연출의 위치는 시나리오를 써가고 액션과 컷을 외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하고 때론 다른 사람들이 다 힘들고 지쳐도 과감히 밀어 부쳐야하는 것이 연출이다. 진정 스태프들에게 미안한 것은 밤샘촬영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길어지는 시간과 몸의 피곤함 때문에 더 나은 장면을 찍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편집하면 괜찮겠지 뭐" 라고 말하는 것이다.

처음엔 나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니까 최대한 저들의 편의를 봐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적당히'했다. 그러나 그 것이 잘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상투적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을 담아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갈게요" 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막히던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상영까지 왔다.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 만들었지만 막상 엄마 앞에서 틀어진다고 하니 걱정되었다. "내가 전하고 싶었던 말이 전달될까?, 혹시나 오해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들로 상영 내내 가슴을 졸였다. 영화를 보고 나를 안으면서 울었던 엄마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엄마는 고맙다고 했고 비로소 내가 하는 것들에 대해 인정해주었다. 엄마 뿐 만 아니라 판돌들과 친구들에게도 내가 영상방에서 "영화를 찍는 유란"이라는 모습을 새롭게 보여줄 수 있었다.

더 이상 나는 쭈뼛거리면서 주변을 맴도는 사람도, 노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도, 아무 생각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사실 [DEAR]는 자기위로성이 짙은 영화다. 엄마와 내 관계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도로 만들기 시작했지만 내용이 전개 될수록 '나는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연출자의 마음이 커져만 갔다. 1년이 지난 지금 [DEAR]는 어떤 면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화다. 첫 작품이라 오그라드는 마음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깊숙이 감추어 놓아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이 영화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내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다. 다시는 변명을 늘어놓는 영화를 찍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투-스트라이크: bitter sweet

영화를 찍는 것이 제일 재밌었다. 시나리오를 쓰고 며칠씩 촬영을 하고 컴퓨터 앞에서 죽치고 편집을 해야 하는 것이 무척 힘들긴 했지만 한 편을 완성하면 그 것이 나를 채워 주는 것 같아 좋았다. 다른 건 다 하기 싫었고 그냥 영화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곳에선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을 해도 정이 안가는 인문학이며 한겨울 추운 날에 컨테이너에 앉아서 들어야 하는 강의며 영어면 영어지 글로비시는 또 뭔지. 정말 하기 싫었다. 해보려고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냥 하기 싫다는 말로 일관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열심히 하는데 왜 넌 안하니 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이 타고난 성향이란 것이 있는데 어떻게 다 좋고 열심히 해요"라는 말로 받아쳤다. 스스로도 그 말을 납득하지 못한 채 말이다.

여전히 나는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했으며,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 싶어 낯선 것은 피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피했다. 인문학 프로젝트 때 김찬호 선생님이 <문화의 발견>이라는 책으로 강의를 해 주셨다. 모르는 것에 도전하고 싶지 않은 내게 처음 접하는 인문학은 하기 싫은 것이 되었다. 전반적인 우리 문화에 대해서 공부했는데 끌리는 것이 없어서 앉아만 있었다. 2학기 때도, 3학기 때도 인문학은 그냥 저냥 흘러갔다.

처음 열심히 했던 공부는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기획 강좌였다. 김찬호 선생님과 하는 인문학 강의 보다 좀 더 어려운 내용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이 태반이었지만 그 중에서 '미학'은 내 눈길을 끌었다. 아름다움, 예쁜 것, 美를 좋아해서 그런지 어려운 말이 나와도 집중해서 들으려고 애썼다. 고대 미술에서부터 현대 미술까지, 미술의 전반적인 것을 알려주셨다.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 미술'은 나를 감동하게 했다. 색의 경계가 거의 없는 부드러운 붓 터치를 사용한 그림들에게서는 행복이 묻어나왔다. 한참 모든 것에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던 때 여서 그런지 그림 속의 웃는 사람들의 모습을 닮고 싶은 마음 때문에 더 끌렸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눈에 보기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이 불편하지 않은 것을 쫒으려는 판타지동화 오덕후 경향도 보탬이 되는 듯하다. 피곤하고 지겹고 힘든 것들이 널려있는 세상에서 행복해 보이는 모습들을 보며 눈의 평온을 찾고 싶었다.

이런 미학에 대한 관심은 세이랜·유리와 함께 한 <이미지 탐구생활>까지 연장되었다. 세이랜은 미술에 전반적인 역사를 훑어주고 그 것과 더불어 유리가 사진과 영화에 대해 강의해주셨다. 이 프로젝트 내내 내가 고민한 부분은 '시점'이었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것이었다. 드로잉 실력의 형편없음도 큰 문제였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보여지는 구도를 구상하는 것이었다. 내 의도를 이미지로 구현했을 때 잘 전달될 만한 구도를 짜는 것이 중요한데 스토리보드를 몇 장 그리다보면 다 비슷비슷한 구도가 되어버려 지루한 감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림과, 사진들을 보며 작가들이 취한 시선과 구도에 대해 집중했다. 그림 <폴리베르제르의 술집>과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눈길이 갔다. 이 그림들 안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점이 교차된다. 등장인물들의 눈, 거울, 문 등을 통한 교차시점을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청소년을 위한 하자인문학>과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을 통해 기존의 텍스트와 내 삶의 연결지점 찾기, 나만의 시선 갖기에 대해 배웠다면 <컨테이너 어페어> 프로젝트와 는 보다 구체적인 사례와 주제를 가지고 작업물로 표현하는 시간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컨테이너 어페어>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열린작업장은 '도시'와 '재개발'에 대한 관심을 지속했다. 이 전까지 내 관심사를 나와 내 주변 정도로 국한 시켰던 것을 좀 더 바깥으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마구잡이식의 개발과 그 때문에 힘들어하는 노동자 등 잘 정돈된 도시의 이면에 대한 공부를 하며 를 주제로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영등포를 중심으로 각각 동, 서, 남, 북으로 하루 동안 여행하며 각자가 생각하는 도시를 카메라로 찍어오기로 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는 돌덩이들, 존재감 없이 서있는 빌딩들을 찍기는 싫었다. 내가 생각하는 도시는 결코 회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삭막해 보이는 공간들을 우리 마음대로 활기차게 바꾸는 퍼포먼스를 하기로 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나 버린 작은 동물들을 위한 집을 짓기도 하고, 삭막한 벽에 그림을 그리기도하고, 지나다니면서 모은 돌들로 도시 한가운데 탑을 쌓기도 하면서 도시를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갖게 되었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직접 밖으로 나가 주변을 관찰하고, 그 순간 즉각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과정들이 생각보다 좋은 동기부여가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 놓는 것부터 시작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도시문제에 대해 그 동안 내가 생각하고 공부했던 것을 바탕으로 도시의 아름다움, 도시도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다른 매체를 다루는 사람들이 모이니 훨씬 생각의 폭도 커졌다.

비록 1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상, 사진, 전시물, 그림 등 다양한 방식의 결과물이 나왔다. 를 통해 팀 작업의 시너지 효과, 학습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경험을 했다.

영화와 공부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어떤 말들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들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학습과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유리가 말해주셨다.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좀 더 풍성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낯설고, 하기 싫은 것들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넘어서 세상과 마주하는 시선의 확장이 필요하다. 또한 그렇게 학습한 것을 필기노트에 박아 두는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물들을 내 작업으로 가져오는 것이 이제 해야 할 일이었다.

1회 말: 맞닥뜨리는 힘

수료를 앞두고 영화 한 편을 더 찍자 마음먹었다.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조심스러웠다. [DEAR]처럼 픽션을 담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나를 주제로 찍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번에도 중심은 내가 되었다. 하지만 나를 변호하는 방식의 내용은 쓰지 않으려했다.

19년을 살면서 '핫'하거나 '쿨'하지 못한 채,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상태의 관계를 유지하는 나.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정리하는 시점에서 되돌아 볼 필요성을 느꼈다.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그려낸 영화가 [DEAR]라면 [한 조각]은 좀 더 객관적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영화다. 짧은 에피소드들을 묶음으로써 모두가 한 번쯤은 겪어 보았을 내용으로 나 뿐만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도 동의할 수 있길 바랐다. 영화는 연출이 하고 싶은 말만 이미지로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공감을 끌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연출과 관객이 소통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의 엔딩을 오랫동안 고민했다. 진정 내가 ‘핫’하거나 ‘쿨’하지 못한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그렇게 되기 위한 내 노력들은 무엇이었는지 한참 생각했다. 숨지 말고 모든 관계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결말이었고 영화의 엔딩 또한 그렇게 정했다.

길찾기 자서전을 썼을 때도, 처음 영화를 찍었을 때도, 매 학기 쇼하자를 할 때도 항상 머리가 터져버릴 것처럼 힘들었다. 저번에 그렇게 힘들었으면 이번엔 좀 덜 힘들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배로 힘들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난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길찾기 담임이었던 귀를 만났고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귀는 내게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고 나가면 앞으로 닥쳐올 많은 힘듦은 어떻게 견디겠니." 라고 말씀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중학교를 다녔고, 큰 포부 없이 작업장학교를 들어왔다. 겨우 첫 발을 내딛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끝내지 못한 채로 나가면 앞으로의 내 인생도 '그냥 저냥'이 될 것 같았다.

두 번째 영화까지 찍고 수료식을 보름 쯤 남겨 놓은 상황에서 되돌아보다가 갈수록 힘듦과 아픔이 커지는 건 내가 제자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좀 더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 자리에만 있으면 더 고민하지 않고 더 부딪히지 않으니 힘들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거지. 그러나 그런 힘듦과 아픔을 이겨내고 나면 훨씬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더 치열하게 맞닥뜨리려 노력하게 된다.

어쩌면 수료를 하는 것이 '피하고 보는 삶'을 '맞닥뜨리는 삶'으로 다가가는 첫 번째 발돋움이 아닐까 싶다. 하기 싫은 것도 견디면서 해 보았고, 그만 두고 싶었어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는 심보로 참아보았다. 무언가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나는 분명 성장한 것이다. 영상방의 죽돌이라고 하면 나를 떠올릴 수 있게 된 지금, 그 시간들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는 느낀다. 물론 토토와 허브, 느즈막이 합류한 유메도 함께. 그것만으로도 내 하자작업장학교 생활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끔 우리 팀은 오붓한 자리를 만든다. 담임인 유리까지 함께 모이면 꼭 하게 되는 이야기가 지난날의 우리들을 회상하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유리는 이 멤버가 모이게 될 줄 몰랐다며 수료를 하는 것도 신기하다고 말한다. 허브와 토토, 그리고 나. 겉모습부터 속까지 너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만든 캐치스코프는 꽤 좋은 팀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2년 반이나 함께한 우리는 이제 서로에 대해 잘 안다. 쉽게 기분에 좌우되지 않아 팀이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토토가 있어서, 누가 힘들어하고 있고 누가 기분이 좋은지 남들보다 빨리 알아채는 허브의 감수성이 있어서, 다들 축 쳐지고 공기가 무거워 질 때 “이건 아니지 않나”라고 끊어줄 수 있는 내가 있어서 우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며칠 전 수료에세이가 난관에 봉착했다. 자신의 것만 들여다보고 있느니 당최 뭐가 잘못되었고 뭐가 부족한지 알지 못하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고민 끝에 우리는 허브네 집으로 향했고 늦은 새벽까지 서로의 에세이에 코멘트를 한 포스트잇을 빽빽하게 붙여주었다. 각자 다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만 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어떻게 융합될지 모르는 이 사람들이 서로를 취미와 유흥을 공유하는 단순한 친구가 아닌 서로를 믿고 작업을 할 수 있는 동료작업자라고 인정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완벽한 팀이 되었다.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다른 우리는, 캐치스코프 안에서 서로의 위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에필로그 : 2회 초를 준비하며

영상학교를 마쳤을 무렵 나는 카메라를 잘 잡는 사람이라고 불리길 바랐다. 영화신이 매일 강림하셔서 그냥 휘두르기만 해도 한 편의 예술이 나오길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제 막 작동법을 배웠고 내용 구성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글에 소질 있는 아이였다. 영상을 칭찬을 받기보다 글로 설명을 했을 때 훨씬 이해가 잘 간다며 많은 사람들이 극작과는 어때?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보렴 같은 말을 해 주었다. 다른 친구들이 찍어오는 영상을 보며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나는 카메라를 잡는 것이 훨씬 좋은데 말이다.

스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참동안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앞으로 나는 뭘 하는 사람이 되지?', '돈은 얼마나 벌 수 있을까?' 그리고 '카메라를 잡을 수 있을까?'. 보다 잘 하는 것을 택할 것인지, 보다 좋아하는 것을 택할 것인지, 좋아하는 것을 한다면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게 될지 하는 걱정들이 밤마다 내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모든 청소년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며 아픈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한 동안 나도 아팠다.

인위적인 표정을 지으며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예쁜 마냥 셀프카메라를 들었던 내가 내 언어로써,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위해 내가 아닌 세상으로 카메라를 돌리게 되었다. 처음은 단순히 해 볼까? 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여전히 피하고 싶은 문제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카메라라는 도구를 가지게 되었고 그 것을 통해 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혼자서도 다 잘 할 수 있어!" 라고 자만심에 빠져있던 내가, 동료작업자를 얻고 그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나는 시너지 효과를 경험했다. 하기 싫은 것도 참고 해 보는 경험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졌다.

그동안 막막한 미래를 생각하며 울고, 막막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배울 것을 찾으면서 '나'라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고 나가면 앞으로 닥쳐올 많은 힘듦은 어떻게 견디겠니."

힘들어도 마무리를 지어보는 경험을 했다. 앞으로 닥쳐올 많은 힘듦을 좀 더 어렵고, 눈물겨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을 거고 정면으로 세상을 향해 카메라를 들 수 있다. 지금의 경험으로 인해 모든 것을 훨씬 담담하게 받아들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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