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더 밝혀야 할 시간>
0-1. 삼단 밝기조절 스탠드
얼마 전, 스탠드 전구를 새로 갈았다. 내 스탠드는 삼단으로 밝기조절이 가능한데 그 전에 쓰던 전구는 고작 한 단계의 밝기밖에 설정할 수 없었다. 새로운 전구는 그 전 보다 컸고 무엇보다 삼단 조절이 가능해서, 나는 좀 더 기분 좋게 잠들 수 있는 구실이 생겼다. 잠들기 전 누르는 스탠드 버튼은 습관적이면서도 필수인데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하니 기억조차 흐물흐물 할 정도다.
비단 잠을 잘 때 뿐만인가 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어서, 어두컴컴할 때에 하는 행동들 대부분 스탠드를 켠다. 형광등의 하얗고 조금은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퍼지거나 밝음과는 다른 이것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권태기조차 오지 않는가보다. 언제부턴가 하자에서 지낸 하루의 고단함을 마무리하러 침대에 누우면 항상 책상에 놓인 스탠드가 잠드는 그 순간을 함께 했다. 하자에 몸담았던 2.5년은 때론 밝고 아름다웠지만 때론 눈만 깜빡거리다 산산이 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켜지기도 하고 조금은 흐려지기도 했던 지난날의 전구는 마치, 그 상황들이 아닌 거기 있던 나의 비유 같다.
불은 내가 켠다. 끄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밝기도 맘대로 조절한다. 때론 같이 불을 밝히기도 했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밝아지기도 했으며 이제 전구를 새로 갈아 끼울 시기가 됐다. 2.5년이나 밝힌 것이 아니라 2.5년밖에 밝히지 않은 거다. 단정 짓기엔 아직 갈아 끼울 전구가 많이 남았다. 그 중 첫 전구와 함께 했던 2.5를 여기에 적는다.
1-1. 장식만이 화려했을 뿐
처음 불을 켰던 때가 언제인가 하니, 역시 일단 시작으로 첫 머리를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자에 들어왔다. 내가 제일 작았다. 예상은 했지만 어쩐지 거기서부터 조금 주눅 들었다. 하자의 첫 인상은 무서웠다. 항상 새로운 무언가는 그랬지만 유달리 그때가 그랬던 것은 입시를 때려 치고 나온 것에 대한 부담감이었다.
원래 처음 내가 짜놓은 계획대로라면, 나는 하자 입학식이 아닌 예고 입학식에 있어야 했다. 힘들게 서울과 일산을 오고가는 입시생이었던 시절은 불과 2년 만에 회의감과 의문으로 끝났다. 입시가 나를 작은 틀 안에 맞추고 가둬놓는 것만 같아 괴로웠다. 나중엔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문제까지 파고들었다. 너 미술 하고 싶니? 스스로 물었지만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쳤다. 좀 더 다른 걸 찾아보고 싶었다. 내가 잘,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것. 그렇게 열일곱의 나는 3월의 봄, ‘왜 있잖아, 조그만 애’ 라고 말하면 누구나 기억할 만한 제이로 하자작업장학교에서 길찾기로서의 첫 도장을 찍었다.
아침에 요가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빠져도 괜찮다는 인식이 슬그머니 자리 잡았다. 빠져도 별 말씀 안하시는 프로젝트 판돌을 보며 안심하고 아침잠을 잤다. 잠 때문에 작업장 프로젝트에서 드로잉파트를 아예 통째로 빼먹기도 했고 영상작업으로 오프닝 타이틀을 배울 때도 수업 중간에 들어갔다. 후에 유리에게 인사를 해도 잘 안 받아 주셔서 내가 수업 내내 지각해서 밉상으로 찍혔구나 하며 절망도 했다. 그땐 한창 습관이 몸에 배어서 거의 새벽 3-4시까지 안 잤다. 그러니 10시 등교조차 힘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오죽하면 판돌들과 ‘세 시전엔 꼭 자기’라는 약속을 했으려나 싶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대한 의지가 더 약했기에 그 누구의 말도 깊게 들어오진 못했다.
이런 습관은 주니어 1학기 내내 지속됐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학교중심방엔 엄청 편한 소파가 있었는데 거기 앉기만 하면 졸음이 솔솔 오곤 해서 지겹다 싶을 정도로 잤다. 별 필요 없는 것만 지속성을 가지는 것 같아서 후에는 좀 짜증이 났다. 잠보다 더 커다란 벽이 있었다. 작심삼일을 꾸준히만 한다면 그것은 작심삼일이 아닐 수 있다지만 어디 그것이 쉬이 되는 마음가짐이냔 말이다. 이런 나약하기 그지없는 내 마음은 변명으로 점철되어 초심을 부정하게 했다. 찾자가 아닌 지금 당장의 흥미에 포커스를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성실을 상실한 죽돌 생활은 그 벽으로 인해 더욱 어렵지 않았다. 정말 하고픈 것을 찾고 싶다고 온 애가 정작 흥미 없다고 프로젝트는 내팽개치고, 잠만 자고 결석을 일삼는 생활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건, 그 어떠한 말로도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다만 그때 유일하게 가장 신경 쓰고 민감했던 부분이 “관계”였다. 사람이든 작업이든 또 다른 특정 무언가든 모두 조금씩은 다른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걸 길찾기가 되고 처음 알았다. 허나 관계라느니 소통이라느니 하는 건 되게 미숙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거기에 대한 집착이 생긴 것 같다. 뒤쳐지기 싫은 성향이 강해서 더 그랬다. 누구에게나 매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장난도 다 받아주고 맞춰주고 웃어줬다. 하지만 왜인지, 점점 지쳐가는 마음이 생기자 그 모든 게 귀찮아지면서 슬펐다. 워낙 좋고 싫음이 분명한 성격이라 더 그랬다. 하지만 그만 두거나 팽개치진 않았다. 그게 그때의 나로서는 가장 시간과 관심을 쏟았던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것조차 없으면 여기서 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태로 걸바를 갔다. 유난히 따듯한 날씨의 4월은 힘을 내기에 충분했다. 그 기운을 받아 쫄래쫄래 걸었다. 힘들었지만 너무너무 즐거워서 그쯤이야 했다. 그 따듯함 안에서 차가움이 일어났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시발점이 된 그 사건은, 한 죽돌을 놓고 여러 죽돌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분위기를 조장했던 일이었다. 피해의식에 절고 관계에 지친 내 정신머리는 특정 상대를 향한 미움으로 나타났다. 속에만 담아두고 있던 말을 밖으로 뱉고 나니 요상하게도 미움은 더 커지고 색안경은 도수도 높아졌다.
그러나 사실 같잖은 이유로 쉽게 싫어하고 쉽게 풀리던 단순함이 있어서 그랬는지 시간이 자연스레 그 기분을 해결해줬다. 후에 사과편지를 주고 간단하게 인사하며 그 죽돌과의 관계를 별 무리 없이 이어갔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그 죽돌 얘기가 나오면 솔직히 마음이 불편하고 부끄럽다. 아주 작은 피해의식이 부풀어올라 타인을 공격할 수 있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알게 됐다. 꽃씨파티를 길찾기가 기획했던 적이 있었다. 19명이 멍석방 꽉 들어차게 옹기종기(이런 귀여운 단어를 쓰고 싶지 않지만) 모여서 긴 회의를 진행했다. 침체된 분위기에 다들 기운 빠지는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조용히 몸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난 울었다. 왜? 단지 그 분위기에 휩쓸려 힘들어서 그랬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일단 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있지 않았기에 더 힘들었다. 거기에 쏟은 관심은 몸뚱이 뿐이었다. 그런 상태가 쇼하자 기간까지 쭈욱 이어졌다.
걸바때 본 밤바다는 내게 특별함으로 남아있어서 혹시 다시 보면 뭔가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친구와 바다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본 바다는 별 특별한 것도 없었다. 9박 10일간의 여정과 마주친 밤바다와 버스타고 몇 시간 만에 달려간 바다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가서 하자를 그만 두겠단 생각은 던져버리고 오긴 했으나 다녀온 후에도 여전히 아직 그 상황과 내가 아주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해야 할 일로 힘든 것은 좋지만 어떻게 하면 잘 할까 머리를 굴렸다기보단 그냥 힘들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멈춰있었다. 그러니 하기 싫을 수밖에. 자서전을 쓰고 뮤지컬을 만들고 몸벌레를 했는데 남들 앞에서 부끄럼을 많이 타는 나에겐 이 모든 게 별로였다. 결국 어영부영 엉망이던 길찾기를 끝냈다.
그렇게 길찾기 내내 관계 어렵다고, 작업하기 싫다고 떼쓰고, 땡깡부리고 투정부렸더랬다.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다고 울어제꼈더랬다. 허나 내 마음은 전형적 갈대라서, 쇼하자가 끝나자 다음 학기도 하기로 맘먹었다. 사실 나간다 한들 무엇을 해야 되는지 몰랐기도 했고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한참 못해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어느 매체에서 학습을 해야 하나. 또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그중 디자인은 정말 가기 싫었다. 그리기 싫었고 찔렸으니까. 처음부터 포장됐던, 입시를 때려 친 이유는 진심을 숨겨둔 상자였다. 물론 어느 정도 사실이 가미 된, 도주였다. 겉멋 든 사람이 싫었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었단 걸 느끼고 찔린 순간부터 그림 그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리지 않는 게 유일하게 내 죄책감을 덜 수 있는 거였다. 그럴수록 더 부딪히라는 코멘트를 받았더랬다. 먼저 떠오른 건 부모님이었다. 내 길찾기 생활을 묵묵히 지켜보던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군소리 없이 잘 하고 있던 입시를 때려 치고, 제 갈길 가고 싶다며 간 딸내미인데. 이건 아니거니 싶었다. 만회하겠단 마음으로 디자인을 택했고 그렇게 후회로 가득한 채, 여름은 왔다.
1-2. 스위치를 켜야 하는 순간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을 비비던 겨울, 전시를 했다. 틴에이지 회/로망이란 타이틀의 전시회에 참여하여 한켠에 우리가 만든 동화책이 전시됐다. 제목은 <물에 빠진 물고기>. 어느 물고기공주가 마법의 약을 먹고 인간이 되어 왕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슬픈 이야기가 담긴, 크레용 물고기의 첫 작업물이었다. 크레용 물고기는 이제 갓 길찾기에서 주니어 1학기로 올라온 센, 유메, 새삼, 제이가 동화책을 만들어보자며 결성한 팀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 만났다기 보단 그냥 하고 싶어서 만났다. 그전까지 서로 그렇게 친하진 않았는데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며 거의 항상 같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똘똘 뭉친 크레용이 됐다.
서로 개성도 성격도 다른 넷이 모여 깔깔댐으로 카페 그래서와 중심방을 채웠다. 잠시의 트러블도 있었지만 그리 크게 맘 담아 두진 않았다. 막판에 몇날밤을 새워 완성된 우리의 동화책은 인천 스페이스빔에서 전시됐다. 바쁘고 고단했지만 9시간에 걸쳐 쌓인 응어리를 푼 뒤라 마지막까지 서로 힘내자 하며 쇼하자와 전시를 준비했고 12월 추위 속에서 우리 내부의 따스함으로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난 이 작업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한 번도 전시장에 개인적으로 가본 적 없고 후에 동화책의 행방도 제대로 알지 못한 이 무관심이란! 이때까지도 내겐 이들과의 ‘관계’가 중점으로 자리 잡았다. 작업은 그들과 함께 더 즐겁기 위한, 그리고 무엇이라도 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한 일종의 매개체였다.
때문에 그냥 작업을 한 사실이 중요할 뿐, 작업물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그 작업에 대한 이렇다 할만한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 왜? 라고 물었다. 무슨 작업을 하든지 이유가 필요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워서 버벅거리며 대꾸도 못했다. ‘모르겠어요, 그냥’으로 마무리하는 태도는 먹히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설명해야했다. 또 다시 내 짜증이 발동했다. 그땐 몰랐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걸. 무엇을 하든 이유는 있었다. 단지 내가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흥미 있는 것조차 조금만 상황이 힘들어지면 쉬이 잊고 관심 밖의 것으로 치부해 버리곤 했다. 작업은 안중에도 없고 내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계속 다른 곳에서 낭비되는 탓에 내가 가진 가능성과 능력들이 수면으로 드러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2학기가 되고 디자인팀 tot에게 영상팀 캐치스코프와 열린작업장 P.V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고 함께 작업하게 됐다. 연애도 시작했다. 익숙치 못한 관계들에 좋기도 했지만 당황스러웠다. 학기에 접어들수록 맘은 혼자 히키코모리처럼 돼갔다. 연애에서 받는 좋지 않은 파장이 작업에까지 이어졌다. 나만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애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얼마만큼 힘든지 알아주길 바랐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엔 짜증으로 받아쳤고 남 탓하기 일쑤였다. 오지게 싸우고 결국 마지막엔 항상 울었다. 부끄럽지도 않았나 싶을 만큼. 여기에 소비되는 내 정신적, 감정적 무게가 너무 크다보니 얼굴은 늘 종이 구기듯 구긴 죽상에 회의 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지난 번 꽃씨파티 때처럼 그 분위기에만 힘들었다. 주변은 안중에 없고 눈앞에 씌인 안대를 벗을 생각에 까지 미치지 못하는 나를 고민하게 됐지만, 곧 자기합리화로 무마한 채 넘겼다. (후에 세이랜은 소녀들은 너무 자기연민에 빠져있다고 한탄하셨다. 마침 이것이 작업에 개입됐을 때 나는 그 안에 있었지만 없었던 거란 걸 생각하던 시기여서 엄청 찔렸던 적이 있다.) 아무튼 얼굴로 그렇게 시위하고 다니는 생활을 4월에 접고, 편도수술을 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는데 정말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병원침대에 뉘여 실려갔다. 수술실은 영화에서 보던 풍경과 다를 것 없었고 눈 한번 감고 뜨니 그것은 끝나있었다. 처음 해보는 수술은 한 달 만에 몸무게를 5kg이나 앗아갈 만큼 악독했다. 덕분에 살빠졌다고 좋아했던 적도 있지만 나중엔 한 달 내내 죽과 아이스크림으로 식사를 대신한 것 보다야 차라리 살 안 빠지는 게 나을 정도란 생각도 들었다. (된장국에 계란말이를 처음 먹던 날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몸의 아픔보다 참기 힘들었던 건 그저 병실 안에서 갑갑하게 시간을 지내야 한다는 거였다. 빨리 다시 학교로 달려가서 동료들을 만나고 싶고 작업 하고 싶었다. 수술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게 만들어줬고, 무엇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날들이 괴로웠던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작업에 대한 의욕도 재충전시켜주는 발판이 되었다. 2학기 마무리 에세이에 이런 문장이 있다. ‘수술 후 학교를 처음 갔던 날, 하자의 붉은 벽돌이 반갑게 느껴진 적은 1년 동안 하자에서 등하교를 한 이래 처음이었다.’ 진짜다. 수술로 탄력 받아 돌아와서 P.V에 등장하는 짱병캐릭터를 맡아 그렸다. 일일이 손으로 움직임을 한 장 한 장 그려야 했기에 주말까지 반납했다. 싫었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안그래도 크게 뒤집히고 흔들리던 작업이라 그런지 다들 아쉬움도 많았는데, 난 관심을 엉뚱한 곳에 너무 많이 쏟아버려 뒤늦게 같이 일한 사람들에게 엄청 미안했다. 그만큼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부분으로라도 채우고 싶었다. 그리고 줄곧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끙끙대며 있던 것보다야 내가 할 일이 있고 그것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해! 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다른 곳에 쏟았던 관심과 수고를 여기에 쏟으며, 내키지 않고 힘든 것도 애정 어린 눈으로 보고 만지면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언제 이런 말을 들었다.(꽤 자주 들었던 것 같다) 관심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거라고.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역시 백번 듣는 것보다야 몸소 느끼는 게 훨씬 낫다.
여기서 제일 크게 배운 것 중 하나는 본인의 동기부여, 자기주도적 학습이 중요하단 건데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사실 아직까지도 내 입맛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을 알기에 달라진 나일 수 있다. 이제 와서 안타까운 사실은, 알지 못했던 그때에 외면한 것들을 좋아할 기회조차 놓친 것만 같다. 당장 눈을 감고 귀를 막기엔 너무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았을 텐데.
2-1. 색은 다르되, 밝기는 더 밝게
지난 학기 내내 구긴 폐휴지 닮은 얼굴 모양새였다고는 하나, 내 얼굴이 사실 그리 구김만 많은 것은 아니었다. 조울증처럼 미친 듯이 웃고 다니는 시기도 있듯, 지칠 대로 지쳐 말아먹은 시간 때문인지 마음이 좀 편했다. 비온 뒤 땅이 굳는다고 하지 않던가. 마음이 편해지기까지 온갖 설레발은 다 치며 작업을 여럿 망치기도 했지만 그렇게 서서히 맘 잡고 다시 불 켤 에너지를 충전했다. 디자인이 아닌 영상매체를 직접 다뤄볼 수 있게 된 건 주말영상학교를 시작하면서였다.
p.v작업을 할 때 내 손으로 그린 캐릭터들이 프레임 안에서 움직임을 갖고 이야기를 밀고나가는 모습이 신기했고 더 해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정말 의욕으로 가득한 프로젝트였다. 영화를 보기도 하고 직접 찍어보기도 했다. 신기하게만 보이던 카메라를 직접 들고 찍는다니!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감출 수 없었고 평생 찍게 될 줄 몰랐던 영화도 찍었다. 시나리오를 쓰느라 밤도 여러날 샜다. 즐거워서 어쩔 줄 몰랐다.
하자에서 이렇게 관심을 쏟았던 때도 있었나 싶을 만큼. 그만큼 깨지기도 많이 깨졌지만 같이 밤을 새고 같이 촬영 하고 같이 편집하고, 혼자만 아니라 다 같이 만들어내는 작업이었기에 괜찮았다. 반면 몸은 지치고 고단했다. 밤새는 일이 빈번했고(어느 날은 이틀 밤새워 시나리오 쓰고 하자 가려고 지하철 탄 후, 문 쪽에 서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깜빡 놨더니 지하철 봉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그게 계속 반복 되서 부끄러운 나머지 나중엔 아예 벽에 기대 서서 잤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샜나 모르겠다.) 촬영도 서로 스태프를 뛰어주다 보니 일정이 빡빡했다. 하지만 그보다 큰 설렘에 그것쯤 아무 것도 아냐 했다.
공동작업에 대한 더 큰 기대와 욕구를 심어주기에도 충분했다. 크레용 물고기때 관계를 이어나가고 결과물을 위해 작업을 하긴 해야겠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이었다. 그런데 그때와 달리 너무나 의욕이 충만해서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고 믿었던 이번에도 같은 어려움이 닥쳤다. 뭐라도 막 찍고 싶은데 뭘 찍어야 할지,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 고민보단 당장 코앞에 놓인 촬영이 앞섰기에 신경 쓸 겨를 없이 빨리빨리 진행시켰다. 평소 취향인 판타지로맨스(?)적 단편영화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내 첫 단편영화의 탄생이었다.
3학기는 내 기억에 가장 설렘 가득했던 학기였다. 편협함을 벗어나 다양한 작업자들과 작업을 만나 배우고 움직이며 빨빨 돌아다녔다. 열심히 켠 불을 지속성 있게 가져갔더니 생긴 이득은 꽤나 짭짤했다. 쓸데없고 과한 관심은 어느 정도 적당선이 유지될 수 있게 됐고 그것은 더 이상 엉뚱한 곳이 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어딘가에 간절함을 쏟고 있는 내 상태가 ‘너무 좋아!’ 라며 이를 앙 다물 수 있기가 어디 쉬운 일이었나. 거기에 더해진 ‘같이’ 시너지 효과는 환타지아를 외쳐야 할 것 같다. 불이 꺼지지 않을 지속력을 가지게 된 것도 혼자의 힘은 아니었다. 나도 함께 했던 사람들의 불에 지속력을 넣어준 사람 중 하나가 되었나?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랬을거라 생각한다. 뭐든 한 쪽만 움직인다면 그건 일방적 그 이상이 될 수 없을 테니.
2-2. 불이 닿는 모든 것을 볼 줄 아는 것
올해 첫날, “똑똑하고 현명하고 나쁜 소녀가 되는 걸 해보자”는 문자를 받았다. 열아홉. 고3이라 불리는, 곧 스물이 될 나이를 먹었다. 떡국 두 그릇 먹었다고 난 스물이야 하는 어이없는 소리도 늘어놓으며 새해를 맞았다. 가장 맘 편한 방학이었다. 단편영화 <그를 기억하는 방식>을 찍고 들었던 신랄한 평가들을 잊을 수 없다. ‘깊이’가 없다는 중론에 수긍할 수밖에 없던 내 모습은 더 잊기 힘들었다. 나조차도 확실히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은 어느 누구도 납득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꿈보다 해몽도 어느 정도 꿈이 받쳐줘야지. 돌이켜보면 항상 얕은 수면에 잠시 발만 담그고 쑥 빼버리는 방식에 길들여져 있었다. 첨벙첨벙 놀기 위해선 단지 발만 적시는 정도로 만족하면 안됐다. 하지만 무섭고 자신 없었는지 여태까지 들어가지 않고 물장구만 대충 치던 나였다. 그래서 ‘이번만큼은!’이란 마음을 굳게 다졌다. 더구나 수료를 앞둔 수료학기를 보내는 거라 부담이 더 크기도 했다. 숨 한번 고르지 않고 열심히 학습 계획에 대해 브리핑했는데 유리가 마지막에 ‘열심히 살자’했다. 다시 한 번 속으로 ‘넵’ 했다. 공동작업의 설렘도 느꼈겠다, 마지막 학기도 지속적으로 설레는 작업으로 멋지게 끝낼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은 단 한 번도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개인 작업을 주로 잡고 가는 학기를 보냈다. ‘다시 쓰는 자서전’을 주제로 잡았다. 길찾기때 자서전 쓰기를 했었는데 그때 쓴 글이 하자에 오기 전 나의 이야기라면 이번엔 하자에 들어와서 그 시간동안의 나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의미였다. 애초에 영상작업을 하면서 기대했던 애니메이션에 미련이 남았는지 애니메이션작업을 하겠다고 했다. 일정표를 짜고 워드에 글을 써내려갔다. 허나 그 글이 뒤집어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건 자서전이 아니라던 세이랜의 말이 얼마나 매몰차게 느껴지던지. 할 말과 기운을 잃었다. 자서전은 단순히 그동안 나에게 있었던 사실로서의 일과 느낌을 정보로만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나의 상황과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긍정하며 의미화 하는지가 담겨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헤매고 고민하며 또 다시 얼굴로 시위했다. 그동안의 모든 고민들이 폭파했고 기억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감당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게 했다. 첫 스타트는 이야기와 위치였다. 동화책을 만들 때부터 줄곧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영화를 찍을 때도 나를 괴롭히던 것은 어떤 ‘이야기’를 담아내야 할지 아득했을 때였다. 알지도 못했고 고민도 안했다. 머릿속 물음표는 질질 끄는 드라마처럼 그렇게 점점 길어져만 갔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왜 알려고 하지 않았던 걸까에 대한, 그리고 위치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던 자신을 향한 자책이었다. 항상 ‘진심’인지 모를 얄팍한 의미부여를 해왔다. 더 깊이 알려고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렇기에 생겨난 버릇 중 하나는 내가 하는 말과 작업을 의심하는 일이었다. 결국 내가 하는 말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까지 다다르자 허구헌날 눈물콧물 쏙 빼고 있었다. 작업 하다가도 너무너무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울고불고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었을 거다.
그 와중에도 어찌됐든 내 작업은 끝까지 잘 끝내야겠단 오기가 생겼다. 마지막 수료학기를 진상으로 시작해서 진상으로 끝낼 수만은 없었다. 그럼 너무 슬플 것만 같았으니까. 고민은 또 고민을 낳고 거기에 대한 글도 써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쯤, 거짓말 안 보태고 2년 동안 밥 먹듯이 들었던 ‘전체를 볼 줄 아는 눈을 키워라’는 게 괜히 한 말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토시오(영화 ‘주온’에 나오는 소년 귀신)를 닮았단 이야기도 종종 듣고 시야 가리는 그 옆머리 좀 어떻게 해보라는 말도 자주 들었는데, 이게 그때의 내 내면과 거리가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꺼번에 밀려오는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 단무지마냥 절여진 나에 대한 후회와 고민은 마음을 후벼팠다.
주변 시야에 전혀 눈을 뜨지 않는 내가 보였기 때문에. 그 참을 수 없는 무관심과 무식함에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나불댔던 지난날의 내 입이 어찌나 방정스레 느껴지던지. 그 사실을 지금껏 무마하고 외면한 거다. 더 고민하고 더 생각하고 더 알아야 했지만 이번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일단 보류시킨 뒤 그걸 토대로 시나리오를 쓰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여기저기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내 간절함이 통한 건지 고맙게도, 다들 각자 할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도와줬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마지막 날, <사랑하는 모든 것>이란 제목을 달았다. 마지막 쇼하자를 앞두고 아프리카에 열흘간 다녀와야 해서 상영회에 틀어진 영상을 보진 못했다.
가기 전날까지 급하게 마무리하고 에세이는 거의 날림으로 쓰고 편집하던 모습이 비행기 안에서 다시금 상기되자 이번 학기 참 뭐했나 싶더라. 하지만 적어도 학기 키워드였던 ‘깊이’에 대해 조금은 가까워지려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무기력함과 자기 함정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기간이 길었지만, 애썼다. 슬펐지만 곱기도 했다.
아직 수면 아래로 깊게 잠수 하지 않았다. 더 깊이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고 난관에 부딪히는 경험을 이제야 조금 해봤을 뿐이다. 준비 운동조차 제대로 하고 들어가진 못했지만 힘들어도 어설프게나마 수영은 해본 거다. 좀 더 배우고 움직이고픈 욕심이 생긴다. 하나씩 필요한 것을 알아가는 과정을 겪은 올 봄부터 여름은 숨가빴다. 날은 후덥지근하고 내 몸도 뜨겁다. 날씨가 더운 게 아니라 내 몸에서, 그리고 마음에서 나오는 열이 뜨거워서 주위가 뜨겁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간절함이 필요했고, 지금도 여전히 필요 하다.
0-2. 2.5의 해석
전구가 자주 깜빡이긴 했지만 결코 완전히 불을 꺼버리려 하진 않았다. 지금 하고 있고 몸담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선 안 된다는 걸 알기까지의 지난 2.5년의 전구는 갖은 수모를 겪었다.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최면을 걸고 합리화 하곤 했지만 동시에 함께 하는 작업에 대해 알고 관계를 맺고 내 간절함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 내가 진정 사랑하는 것을 찾진 못했다. 사랑을 제대로 하는 것인지조차 의심하기만 한 채로 멈춰버린 것 같다. 다만 어느 정도의 사랑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라는 걸 알고, 앞으로 그 사랑할 것을 찾고 싶은 마음도 여전하다.
처음과 달라진 게 있다면 나는 어디엔가 내 간절함을 정착시키고 싶다는 거다. 그것이 허황된 망상이나 단순히 저 멀리 아득한 미지의 꿈이 아니라 앞으로의 내가 살아갈 스물, 그 이후의 삶까지 연장해서 말이다. 찾자로 시작해서 찾자로 끝나는 이 에세이가 뭔가 싶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후벼 파본들, 엄청 대단하다거나 아주 훌륭하다 싶을 만치 무언가는 없다.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기억만 더 또렷할 뿐이라 에세이에 적어내리기 조차 탐탁찮다. 블로그에 비공개로 혼자 끄적거리는 글이라면 욕을 한바가지 썼을 거다. 반성문으로 이 8쪽을 채울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렇게 수료를 말하게 되고 에세이를 쓰게 되는 것은, 결코 내가 이곳에서 부끄러운 시간만을 지내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도피하다시피 이곳에 와서 정말 찾은 것은, 난 앞으로도 펜을 들고 그림을 그릴 거란 확신이다. 생각을 깊이 할수록 머리 아파져서 금방 관두는 습관에 따라, 잠시의 권태기에 주저 없이 아니라고 돌아서버렸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빙글빙글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펜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게 좋다. 마지막에 만든 애니메이션 <사랑하는 모든 것>의 제목처럼, 나는 내가 잡은 펜을 사랑하고 맺고 있는 관계와 작업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것에 내 간절함을 쏟을 차례다. 그것을 안에서 품고만 있을 때가 너무 슬픈 일이란 걸 안다.
그리고 싶어도 무엇을 그릴지 몰라서 펜을 놓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무슨 얘길 써야 할지 몰라서 힘들었던 적도 두세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걸 찾고 싶음에 쏟은 슬픔과 수고가 빛을 발하진 않았다. 꿈꾸던 좋은 결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뭘 하고 싶은 지를 찾기 위해서 필요하고 할 수 있는, 하자는 그 많은 요소들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내가 끊임없이 불을 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해줬다.
그 힘으로 이제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불을 켜며 스물을 맞을 요량이다. 대학가서 좀 더 지식기반의 공부도 하고 싶고, 작업도 충분히 많이 하고 싶고, 운동도 하고 싶고, 자전거 여행도 다녀올 거다. 무언가 또 새로운 배움이 있단 설렘에 벌써 콩닥대지만 한편으론 수료식 이후 더 이상 작업장학교의 죽돌이 아닌 채로 남은 열아홉을 보낼 생각에 마음이 조금 횅해지기도 한다. 이럴수록 담담함으로 맞서고 싶다. 첫 걸음으로 내 마음에 불을 켜야 한다.
그렇게 밝히고 보이는 길,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가며 찾아보려 한다. 남들보다 뒤쳐진 걸 수도 있고 그만큼 더 불안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지금 당장 찾았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그것은 변화할 테니 크게 개의치 않는다. 홀로 불을 켜든, 남들과 같이 켜든, 지금 여기서 겪고 배우고 쓴 것들이 모두 다시 내 마음에서 빛을 내길 바란다. (꺼지게 내버려 둘 것도 아니지만.) 그러기 위한 또 다른 학습의 여정이 내 첫 2.5 전구, 그리고 지금의 수료를 발판으로 삼아, 더 밝은 빛을 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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