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9일 수요일
2009년 9월 2일 수요일
하자단어사전
열린 작업장
하자작업장 학교의 주니어 과정을 이르는 말로 작업의 장르와 목표에 구애받지 않는 ‘열린’ 작업장을 지향한다.
P.V
promotion video의 약자. 2008년 3월부터 6월, 약 3개월에 걸쳐 기존의 좁은 작업영역에서 좀 더 확장된 공동작업을 위해 모인 캐치스코프와 ToT가 함께 제작한 열린작업장 프로모션 비디오 애니메이션
촌닭들
2007년 봄 학기에 만들어진 하자작업장학교의 공연팀이다. 브라질 퍼커션을 중심으로 아프로-브라질리언 리듬, 주로 카니발의 음악을 연주하고 보사노바도 함께 연주했다. 좁은 양계장에 갇혀있는 병든 닭이 아닌, 시골에서 뛰노는 닭들의 건강함을 닮고 보여주고 싶다는 이유에서 촌닭들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Festeza(페스테자)
2009년 8월 재정비한 하자작업장학교 공연팀의 새로운 이름이다. 포르투갈어로 축제라는 뜻의 Festejo와 촌닭들의 노래 중 가장 사랑받았던 곡인 Tristeza(슬픔)의 합성어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슬픔과 축제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정화된 즐거움으로 사람들을 끌어가주는 공연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캐치스코프
Catch+Scope 두 단어의 합성어로 시야를 잡다 라는 뜻이다. 2007년 7월에 11명의 멤버, 판돌 유리로 구성되었고 현재까지 하자작업장학교의 영상팀으로 이어가고 있다. 주로 작업장학교 내 행사들의 영상기록을 하며, 극영화, 다큐멘터리, CF등 다양한 영상들을 만들어내는 팀이다.
크레용 물고기
2007년 가을, 주니어 1학기가 된 디자인팀 유메, 제이, 센, 새삼이 동화책을 만들자는 의견을 모아 결성된 팀이다. 그들의 첫 작품 <물에 빠진 물고기>는 틴에이지 회/로망 전시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학기를 마치고 더 지속되지 못하여 지금은 사라진 팀.
TOT
Thoughtful Eyes Of Guerrilla Teens의 약자. 세상(외부)에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생각해가며 작업하는 디자인 팀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짐하며 이름지어졌다.
흉내내기 워크숍
작업장학교 공연팀 촌닭들(지금은 페스테자)에서 하는 워크숍으로, 새로운 팀원들이 들어오면 기존 팀원들이 지금까지 공연팀에서 배운 것들을 알려주는 워크숍이다. 주로 악기리듬, 노래, 춤 등 공연 요소로 쓰고 있는 것들을 위주로 워크숍을 하며, 배운 것들로 공연을 연출해서 간단한 공연을 해보기도 한다. 단순히 기술만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팀의 분위기, 문화 등에 적응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워크숍을 진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 익힌 것들과 지내오던 방식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워크숍이다.
걸바
걸어서 바다까지 프로젝트의 준말이다. 이 프로젝트는 길찾기 프로젝트며, 길찾기 과정 필수 이수 과정 중 하나다. 총 9박 10일의 기간동안 영등포동 하자센터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낙산까지 가는 프로젝트이며, 이 과정을 통해 죽돌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견디는 것을 알게 되며, 공동의 경험속에서 자신의 속도를 찾는 것을 시도한다.
프리스쿨(Pre-school)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진행되는 프로젝트로, 새로운 주니어 1학기들이 각 작업장에서 하는 일을 경험해 보고 기존의 주니어들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두 번째로 진행되었던 프리스쿨에서는 50명의 주니어들이 함께 한 편의 무성영화를 만드는 미션을 수행했었다.
Pink haja
2008년 2월에 진행된 방학 중 프로젝트 중 하나로, ‘10대들의 성과 연애에 대해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해보는 토크쇼’ 란 부제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처음 섹스/젠더/섹슈얼리티 에 관한 기본 정의로 시작하여, 그 안에 있는 섹스(행위), 연애, 남/여의 역할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무한도전
새 학기를 시작하기 직전에 하는 워밍업 프로그램. 정해진 시간 안에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는 것인데 미션은 당일 공개된다.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연구단이 기획한 인문학강좌를 지칭한다. 처음 하자에서 진행되었던 것은 2008년 봄학기 [하자 인문학 3탄 :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연구단 기획강좌] (이하 기획장좌) 로 시작하여, 지난 2009년 봄학기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 세계를 뒤흔든 8명의 독일인] 이라는 프로젝트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지금껏 공통적으로 진행되었던 ‘인문학’ 프로젝트와는 달리 ‘수강신청’과 ‘정원’이 있던 프로젝트였고, 10명 정도 되는 죽돌들과 함께 진행되었다.
컨테이너 어페어
2008년 가을 하자 앞마당에 설치된 컨테이너 시티에서 ‘컨테이너 어페어’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도시’, ‘공간’ 등의 주제를 가지고 특별 강사 분들을 초대해 강의를 들었다. 이 후 이 프로젝트는 ‘Save My City’라는 도시 탐사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youth tallk
도시와 환경에 대한 10대들의 토론 프로그램. 하자 내에서 시작하여, 이후 홍콩, 영국 등지의 10대들과 토론을 시도했다. 특히 홍콩창의력 학교 학생들과는 비디오 컨퍼런스를 통해 세 차례의 토크가 진행되었다.
greening
디자인붐 국제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그린디자이너 양지윤씨의 작품 제목. 작은 종이카드에 디자인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약속을 만들 수 있다. 디자이너 양지윤씨와 함께 이 그리닝 카드를 이용한 대중 참여 워크숍을 진행했었다.
save my city
2008년 가을학기에 진행했던 프로젝트. 한 학기동안 다루어 왔던 도시에 관한 여러 사유를 바탕으로 하루간의 도시탐사기록을 영상물로 만들어본 것이다. 동서남북으로 팀을 나누고, 각각 <황금도시>,
글로비시
Global English의 합성어로, 프랑스인인 장 폴 네리에르씨가 창조한 새로운 개념이다. 흔히 개인이 이력서에 쓸 수 있는 장기로 생각되는 영어가 아니라 국경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로벌 시대에 소통을 할 수 있는 언어로써의 영어를 강조한다. 상황과 특성에 따라 재구성 될 수 있는 1500단어와 영어의 기본적인 24개의 문장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비영어권의 사람과 영어권의 사람 모두 글로비시로 말해야 의도가 확립된다. 하자에서는 조한의 소개로 2008년 봄 학기부터 학습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도쿄슈레대학
일본 동경에 위치한 비인가 대안학교이다. 도쿄 슈레 대학의 ‘슈레(shure)’란, 그리스어로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18세 이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원이 가능하며, 졸업의 시기나, 정해진 학습의 기간은 없다. 슈레에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그 일을 직업으로 연결하는 프로젝트와, 다른 기관과의 교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자와 도쿄슈레는 2000년도부터 세계민주교육대회(IDEC), 교환학생 프로그램, 글로벌필름아카이브 프로젝트 등 꾸준하게 네트워크를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하자는 2006년 슈레대학에서 주최한 IAFE(International Alternative Film Festival)에 참가하여, 모스코 필름스쿨, 이스라엘 하데라스쿨, 싱가폴 아시안 채널 등과 함께 공동영상작업을 진행하였다. 지난 2008년 8월 도쿄 슈레대학에서 개최된 "Shure University International Film Festival 2008"에 하자 영상팀이었던 ‘Visual rave'가 제작한 ’고스트 걸즈‘와 'KTX:300KM가 들려준 침묵과 함성’ 이 초청되어, 당시 영상팀이었던 ‘캐치스코프’가 G.V를 준비하는 등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창의서밋
2008년 프리서밋을 시작으로 한국, 홍콩, 러시아 등 많은 나라들의 사람들과 함께 창의성에 대한 컨퍼런스와 워크숍을 진행하는 연례행사. 1회 창의서밋은 2009년 7월, 남산드라마센터에서 열렸다. '창의성 위기의 삶과 만나다.'를 주제로 지금 시대에서 삶에 녹아있는 창의성, 창의적인 삶에 대한 심포지엄과 워크숍을 진행했다.
펀치스트라이크_유란
펀치스트라이크
프롤로그 : 1회 초, 타석에 서서
가끔 중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아직도 내가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고 학력인증도 되지 않는 대안학교를 간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일반학교에서의 공부도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선생님이나 학우들과의 관계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 공교육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저항적인 생각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처음 대안학교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중학교를 입학 할 무렵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엄마에게 가 보면 어떻겠느냐 권유를 받았지만 그 때는 교복을 입고 싶은 마음에 절대 안 간다고 했다. 엄마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고 그렇게 중학교 3년을 문산여자중학교에서 보냈다. 3년을 공교육 속에서 살다보니 지겨운 감이 있었다. 그럴 무렵 다시 엄마가 대안학교 이야기를 꺼냈다. 꽤 괜찮은 성적표를 받고도 하자작업장학교에 지원했다. 단순히 '한 번 해 볼까?'에서 시작된 일탈은 지금 에세이를 쓰고 있는 내게 큰 변화를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길찾기 시절은 한숨밖에 안 나오는 나날이었다. 새로운 곳이겠거니 하는 점에서 흥미가 유발되었지만 공교육에서 하는 국영수 공부와 달리 너무나 생소하고 새로운 학습 내용과 방법들, 이를테면, 피아노나 리코더가 아닌 폐품으로 만든 악기를 친다거나 내 삶을 되돌아보는 방법의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내게 일종의 거부감을 가져다주었다. 다른 방법으로 이곳에 적응하려 했다. 친구들 만드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친구지 '무리'를 이루고 싶었다. 공교육에서는 그 것이 당연했으니까. 함께 놀고 함께 수다 떨면서 일상을 공유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곧 이들과 함께 학교를 안 나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길찾기 개인평가서에는 '아쉽다', '좀만 더', '앞으로는 이렇게' 같은 단어들이 태반이다. 이렇게 담임판돌인 귀의 걱정을 한 아름 안고 한 숨의 길찾기를 정리했다.
원-스트라이크: 영화, 새로운 매체를 손에 쥐고.
길찾기를 마치고 막 올라온 허브와 토토와 나에게 1학기는 새로운 것을 접하고 마냥 신기해하는 기간이었다. 비디오카메라는 물론이고 디지털 카메라도 많이 만져보지 못한 나에게 영상은 생각지도 못한 매체였다. 처음엔 글쓰기나 촌닭들을 추천받았는데 하기 싫다고 했다. 글을 엄청나게 잘 쓰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건방지게도 '글 쓰는 아이'로 낙점되기 싫었다. 방방 뛰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 보이기도 싫었다. 나도 진득하게 앉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영상방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캐치스코프가 되었다.
새로 온 길찾기들에게 내 소개를 "영상방 주니어 1학기 유란입니다." 라고 말했지만 아직 영상방은 낯설었다. 나는 어슬렁대고 있는 반면 같이 들어온 토토와 허브는 뭔가 꼼지락거리는 듯 보였다. 길찾기 때에 비해 훨씬 말도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고 달라진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 같았다. 그렇게 그들이 자리를 잡고자 노력할 때 나는 빠르게 적응하는 그들-내가 보기에-을 지켜만 봤다. 쭈뼛쭈뼛 거리며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와 쉽게 문을 열지 못한 나를 영상방 안으로 끌어온 건 20대 작업자 나캉이었다. 나캉은 내게 언니처럼, 동료처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일주일 내내 함께 저녁밥을 먹으면서 친해진 나캉을 비롯한 다른 캐치스코프들과 놀기도 같이하고 나아가 작업도 함께하게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기를 접한 후 비로소 나는 영상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내 목표는 영상방 안에 내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고 염원을 담아 '다음 학기에는 영상방에서 좀 더 쓰임 있는 죽돌이 되고 싶다'고 에세이에 적었다.
2학기가 되어 20대 작업자들은 거의 다 나가고 허브와 나와 토토는 주말영상학교를 하게 되었다. 겁이 났다. 나캉이 언니처럼 굉장히 살갑게 나를 챙겨주었던 반면 윤성과 원, 유리라는 엄청난 멘토들에게는 기대는 것이 어려웠다. '판돌'과 '죽돌'이라는 아직 생소한 단어와 관계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새로 들어온 한결과 남은 20대 작업자 름사, 새로 만난 영상학교 사람들과 함께 '카메라'를 공유할 수 있게 되어 조금은 편해졌다.
첫 단편영화 촬영을 앞두고 있을 때이다. 밤마다 화려한 스킬로 도배된 멋진 영상을 생각하며 잠들었지만 정작 맘에 드는 시나리오는 나오지 않았다. 쓰는 족족 '척'하는 내용들 뿐 이었고 그러다보니 결론이 없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첫 번째 시나리오가 무참히 깨지고 "진정 네가 잘 할 수 있고 가장 너에게 절실한 이야기를 해"라는 크리틱을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찾고 그 것을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숙제였다.
엄마와의 트러블은 1학기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었고 소소한 말다툼이 계속 되었다. 또래들에 비해 돈을 더 많이 쓰고, 화장하고 다니고, 귀가시간은 늦어져만 가는 나를 엄마는 점점 믿지 못한다고 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내내 우울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해" 라고 말한 뒤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으로 제일 나를 괴롭게 했던 '가족(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엄마와 나에 대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겪은 일을 바탕으로 써내려가니 생각보다 쉬웠다. 촬영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너무 술술 풀려서 불안했지만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이겠거니 하며 넘어갔다. 편집을 하면서 그 불안은 나타났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대로 늘어놓았는데 갈수록 앞뒤가 안 맞고 심지어는 이 내용이 내가 겪었던 일인가 싶었다.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뭔지 모르겠어서 또 힘들어했다. 영화란 실제를 그대로 옮겨놓는 작업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필요에 따라 처음과 끝을 바꾸어 버릴 수도 있고 몇 초 줄이는 것이 내용 자체를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겪은 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영화'라는 새로운 시공간에서 나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단순한 시간의 나열이 아닌 내 입장을 갖는 것이 중요했다.
예전부터 뭐든지 혼자 하는 것이 좋았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면 그만큼 부딪히는 것이 많아져 서로를 이해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내가 물러서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지는 것 같아 절대 그러기 싫었다. 적어도 영화를 찍기 전 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영화는 절대 혼자 찍을 수 없었다. 스태프, 연기자 등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만드는 것이 영화다. 그 안에서 연출의 위치는 시나리오를 써가고 액션과 컷을 외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하고 때론 다른 사람들이 다 힘들고 지쳐도 과감히 밀어 부쳐야하는 것이 연출이다. 진정 스태프들에게 미안한 것은 밤샘촬영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길어지는 시간과 몸의 피곤함 때문에 더 나은 장면을 찍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편집하면 괜찮겠지 뭐" 라고 말하는 것이다.
처음엔 나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니까 최대한 저들의 편의를 봐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적당히'했다. 그러나 그 것이 잘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상투적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을 담아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갈게요" 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막히던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상영까지 왔다.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 만들었지만 막상 엄마 앞에서 틀어진다고 하니 걱정되었다. "내가 전하고 싶었던 말이 전달될까?, 혹시나 오해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들로 상영 내내 가슴을 졸였다. 영화를 보고 나를 안으면서 울었던 엄마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엄마는 고맙다고 했고 비로소 내가 하는 것들에 대해 인정해주었다. 엄마 뿐 만 아니라 판돌들과 친구들에게도 내가 영상방에서 "영화를 찍는 유란"이라는 모습을 새롭게 보여줄 수 있었다.
더 이상 나는 쭈뼛거리면서 주변을 맴도는 사람도, 노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도, 아무 생각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사실 [DEAR]는 자기위로성이 짙은 영화다. 엄마와 내 관계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도로 만들기 시작했지만 내용이 전개 될수록 '나는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연출자의 마음이 커져만 갔다. 1년이 지난 지금 [DEAR]는 어떤 면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화다. 첫 작품이라 오그라드는 마음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깊숙이 감추어 놓아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이 영화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내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다. 다시는 변명을 늘어놓는 영화를 찍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투-스트라이크: bitter sweet
영화를 찍는 것이 제일 재밌었다. 시나리오를 쓰고 며칠씩 촬영을 하고 컴퓨터 앞에서 죽치고 편집을 해야 하는 것이 무척 힘들긴 했지만 한 편을 완성하면 그 것이 나를 채워 주는 것 같아 좋았다. 다른 건 다 하기 싫었고 그냥 영화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곳에선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을 해도 정이 안가는 인문학이며 한겨울 추운 날에 컨테이너에 앉아서 들어야 하는 강의며 영어면 영어지 글로비시는 또 뭔지. 정말 하기 싫었다. 해보려고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냥 하기 싫다는 말로 일관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열심히 하는데 왜 넌 안하니 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이 타고난 성향이란 것이 있는데 어떻게 다 좋고 열심히 해요"라는 말로 받아쳤다. 스스로도 그 말을 납득하지 못한 채 말이다.
여전히 나는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했으며,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 싶어 낯선 것은 피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피했다. 인문학 프로젝트 때 김찬호 선생님이 <문화의 발견>이라는 책으로 강의를 해 주셨다. 모르는 것에 도전하고 싶지 않은 내게 처음 접하는 인문학은 하기 싫은 것이 되었다. 전반적인 우리 문화에 대해서 공부했는데 끌리는 것이 없어서 앉아만 있었다. 2학기 때도, 3학기 때도 인문학은 그냥 저냥 흘러갔다.
처음 열심히 했던 공부는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기획 강좌였다. 김찬호 선생님과 하는 인문학 강의 보다 좀 더 어려운 내용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이 태반이었지만 그 중에서 '미학'은 내 눈길을 끌었다. 아름다움, 예쁜 것, 美를 좋아해서 그런지 어려운 말이 나와도 집중해서 들으려고 애썼다. 고대 미술에서부터 현대 미술까지, 미술의 전반적인 것을 알려주셨다.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 미술'은 나를 감동하게 했다. 색의 경계가 거의 없는 부드러운 붓 터치를 사용한 그림들에게서는 행복이 묻어나왔다. 한참 모든 것에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던 때 여서 그런지 그림 속의 웃는 사람들의 모습을 닮고 싶은 마음 때문에 더 끌렸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눈에 보기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이 불편하지 않은 것을 쫒으려는 판타지동화 오덕후 경향도 보탬이 되는 듯하다. 피곤하고 지겹고 힘든 것들이 널려있는 세상에서 행복해 보이는 모습들을 보며 눈의 평온을 찾고 싶었다.
이런 미학에 대한 관심은 세이랜·유리와 함께 한 <이미지 탐구생활>까지 연장되었다. 세이랜은 미술에 전반적인 역사를 훑어주고 그 것과 더불어 유리가 사진과 영화에 대해 강의해주셨다. 이 프로젝트 내내 내가 고민한 부분은 '시점'이었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것이었다. 드로잉 실력의 형편없음도 큰 문제였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보여지는 구도를 구상하는 것이었다. 내 의도를 이미지로 구현했을 때 잘 전달될 만한 구도를 짜는 것이 중요한데 스토리보드를 몇 장 그리다보면 다 비슷비슷한 구도가 되어버려 지루한 감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림과, 사진들을 보며 작가들이 취한 시선과 구도에 대해 집중했다. 그림 <폴리베르제르의 술집>과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눈길이 갔다. 이 그림들 안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점이 교차된다. 등장인물들의 눈, 거울, 문 등을 통한 교차시점을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청소년을 위한 하자인문학>과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을 통해 기존의 텍스트와 내 삶의 연결지점 찾기, 나만의 시선 갖기에 대해 배웠다면 <컨테이너 어페어> 프로젝트와
<컨테이너 어페어>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열린작업장은 '도시'와 '재개발'에 대한 관심을 지속했다. 이 전까지 내 관심사를 나와 내 주변 정도로 국한 시켰던 것을 좀 더 바깥으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마구잡이식의 개발과 그 때문에 힘들어하는 노동자 등 잘 정돈된 도시의 이면에 대한 공부를 하며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는 돌덩이들, 존재감 없이 서있는 빌딩들을 찍기는 싫었다. 내가 생각하는 도시는 결코 회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삭막해 보이는 공간들을 우리 마음대로 활기차게 바꾸는 퍼포먼스를 하기로 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나 버린 작은 동물들을 위한 집을 짓기도 하고, 삭막한 벽에 그림을 그리기도하고, 지나다니면서 모은 돌들로 도시 한가운데 탑을 쌓기도 하면서 도시를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갖게 되었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직접 밖으로 나가 주변을 관찰하고, 그 순간 즉각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과정들이 생각보다 좋은 동기부여가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 놓는 것부터 시작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도시문제에 대해 그 동안 내가 생각하고 공부했던 것을 바탕으로 도시의 아름다움, 도시도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다른 매체를 다루는 사람들이 모이니 훨씬 생각의 폭도 커졌다.
비록 1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상, 사진, 전시물, 그림 등 다양한 방식의 결과물이 나왔다.
영화와 공부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어떤 말들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들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학습과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유리가 말해주셨다.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좀 더 풍성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낯설고, 하기 싫은 것들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넘어서 세상과 마주하는 시선의 확장이 필요하다. 또한 그렇게 학습한 것을 필기노트에 박아 두는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물들을 내 작업으로 가져오는 것이 이제 해야 할 일이었다.
1회 말: 맞닥뜨리는 힘
수료를 앞두고 영화 한 편을 더 찍자 마음먹었다.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조심스러웠다. [DEAR]처럼 픽션을 담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나를 주제로 찍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번에도 중심은 내가 되었다. 하지만 나를 변호하는 방식의 내용은 쓰지 않으려했다.
19년을 살면서 '핫'하거나 '쿨'하지 못한 채,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상태의 관계를 유지하는 나.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정리하는 시점에서 되돌아 볼 필요성을 느꼈다.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그려낸 영화가 [DEAR]라면 [한 조각]은 좀 더 객관적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영화다. 짧은 에피소드들을 묶음으로써 모두가 한 번쯤은 겪어 보았을 내용으로 나 뿐만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도 동의할 수 있길 바랐다. 영화는 연출이 하고 싶은 말만 이미지로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공감을 끌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연출과 관객이 소통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의 엔딩을 오랫동안 고민했다. 진정 내가 ‘핫’하거나 ‘쿨’하지 못한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그렇게 되기 위한 내 노력들은 무엇이었는지 한참 생각했다. 숨지 말고 모든 관계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결말이었고 영화의 엔딩 또한 그렇게 정했다.
길찾기 자서전을 썼을 때도, 처음 영화를 찍었을 때도, 매 학기 쇼하자를 할 때도 항상 머리가 터져버릴 것처럼 힘들었다. 저번에 그렇게 힘들었으면 이번엔 좀 덜 힘들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배로 힘들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난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길찾기 담임이었던 귀를 만났고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귀는 내게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고 나가면 앞으로 닥쳐올 많은 힘듦은 어떻게 견디겠니." 라고 말씀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중학교를 다녔고, 큰 포부 없이 작업장학교를 들어왔다. 겨우 첫 발을 내딛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끝내지 못한 채로 나가면 앞으로의 내 인생도 '그냥 저냥'이 될 것 같았다.
두 번째 영화까지 찍고 수료식을 보름 쯤 남겨 놓은 상황에서 되돌아보다가 갈수록 힘듦과 아픔이 커지는 건 내가 제자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좀 더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 자리에만 있으면 더 고민하지 않고 더 부딪히지 않으니 힘들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거지. 그러나 그런 힘듦과 아픔을 이겨내고 나면 훨씬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더 치열하게 맞닥뜨리려 노력하게 된다.
어쩌면 수료를 하는 것이 '피하고 보는 삶'을 '맞닥뜨리는 삶'으로 다가가는 첫 번째 발돋움이 아닐까 싶다. 하기 싫은 것도 견디면서 해 보았고, 그만 두고 싶었어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는 심보로 참아보았다. 무언가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나는 분명 성장한 것이다. 영상방의 죽돌이라고 하면 나를 떠올릴 수 있게 된 지금, 그 시간들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는 느낀다. 물론 토토와 허브, 느즈막이 합류한 유메도 함께. 그것만으로도 내 하자작업장학교 생활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끔 우리 팀은 오붓한 자리를 만든다. 담임인 유리까지 함께 모이면 꼭 하게 되는 이야기가 지난날의 우리들을 회상하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유리는 이 멤버가 모이게 될 줄 몰랐다며 수료를 하는 것도 신기하다고 말한다. 허브와 토토, 그리고 나. 겉모습부터 속까지 너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만든 캐치스코프는 꽤 좋은 팀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2년 반이나 함께한 우리는 이제 서로에 대해 잘 안다. 쉽게 기분에 좌우되지 않아 팀이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토토가 있어서, 누가 힘들어하고 있고 누가 기분이 좋은지 남들보다 빨리 알아채는 허브의 감수성이 있어서, 다들 축 쳐지고 공기가 무거워 질 때 “이건 아니지 않나”라고 끊어줄 수 있는 내가 있어서 우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며칠 전 수료에세이가 난관에 봉착했다. 자신의 것만 들여다보고 있느니 당최 뭐가 잘못되었고 뭐가 부족한지 알지 못하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고민 끝에 우리는 허브네 집으로 향했고 늦은 새벽까지 서로의 에세이에 코멘트를 한 포스트잇을 빽빽하게 붙여주었다. 각자 다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만 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어떻게 융합될지 모르는 이 사람들이 서로를 취미와 유흥을 공유하는 단순한 친구가 아닌 서로를 믿고 작업을 할 수 있는 동료작업자라고 인정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완벽한 팀이 되었다.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다른 우리는, 캐치스코프 안에서 서로의 위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에필로그 : 2회 초를 준비하며
영상학교를 마쳤을 무렵 나는 카메라를 잘 잡는 사람이라고 불리길 바랐다. 영화신이 매일 강림하셔서 그냥 휘두르기만 해도 한 편의 예술이 나오길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제 막 작동법을 배웠고 내용 구성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글에 소질 있는 아이였다. 영상을 칭찬을 받기보다 글로 설명을 했을 때 훨씬 이해가 잘 간다며 많은 사람들이 극작과는 어때?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보렴 같은 말을 해 주었다. 다른 친구들이 찍어오는 영상을 보며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나는 카메라를 잡는 것이 훨씬 좋은데 말이다.
스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참동안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앞으로 나는 뭘 하는 사람이 되지?', '돈은 얼마나 벌 수 있을까?' 그리고 '카메라를 잡을 수 있을까?'. 보다 잘 하는 것을 택할 것인지, 보다 좋아하는 것을 택할 것인지, 좋아하는 것을 한다면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게 될지 하는 걱정들이 밤마다 내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모든 청소년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며 아픈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한 동안 나도 아팠다.
인위적인 표정을 지으며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예쁜 마냥 셀프카메라를 들었던 내가 내 언어로써,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위해 내가 아닌 세상으로 카메라를 돌리게 되었다. 처음은 단순히 해 볼까? 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여전히 피하고 싶은 문제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카메라라는 도구를 가지게 되었고 그 것을 통해 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혼자서도 다 잘 할 수 있어!" 라고 자만심에 빠져있던 내가, 동료작업자를 얻고 그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나는 시너지 효과를 경험했다. 하기 싫은 것도 참고 해 보는 경험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졌다.
그동안 막막한 미래를 생각하며 울고, 막막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배울 것을 찾으면서 '나'라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고 나가면 앞으로 닥쳐올 많은 힘듦은 어떻게 견디겠니."
힘들어도 마무리를 지어보는 경험을 했다. 앞으로 닥쳐올 많은 힘듦을 좀 더 어렵고, 눈물겨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을 거고 정면으로 세상을 향해 카메라를 들 수 있다. 지금의 경험으로 인해 모든 것을 훨씬 담담하게 받아들 수 있을 거다.
우리의 시공간이 겹치는 순간_포디
우리의 시공간이 겹치는 순간
규연 안녕하세요 규연입니다. 열아홉살이고 음악을 하고 있어요.
포디 앗. 반가워요. 저도 음악을 해요. 전 약 2년정도 브라질리언 퍼커션을 주로 연주해 왔는데, 규연의 음악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저는 포디라고 해요. 저도 열 아홉이예요.
규연 우리 둘 다 열아홉...이제 우리의 10대가 거의 끝나 가네요.
포디 그리고 저는 동시에 하자작업장학교라는 대안학교에서의 2년 반의 학습도 마무리하는 시점이예요. 공교롭게도, 학교를 수료하는 시점에 열아홉이라니, 뭔가 제대로 전환기를 갖는 느낌이랄까요....
규연 (웃음)그렇네요.. 제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독사 두 마리가 있었어요. 그 중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에게 물었죠. “우리 독사 맞지?” 그러자 다른 한 마리가 “맞아 근데 그런건 왜 물어?” 그러자 질문한 한 마리가 “지금 내 혀를 깨물었거든.”
포디 (웃음)그거 미셸공드리의 <도쿄>에 나오는 얘기죠? 저도 그거 재미있게 봤어요. 마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혹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 같다고 느꼈어요. 스물의 문턱에서 할 법한 질문이죠. 꼭 우리 같네요.
규연 그렇죠(웃음)
규연 2년 조금 넘게 브라질 음악을 해왔다고 했잖아요? 그 전에도 음악을 했었나요?
포디 그 전엔 힙합을 했었어요. 비보잉.
규연 하자작업장학교서 ‘음악’ 을 한다는 건 비보잉, 혹은 힙합과는 다른 의미인가요? 사실 저도 음악을 한다. 고 쉽게 말했지만 포디가 말하는 음악은 무엇이지요?
포디 아마도 그냥 ‘음악’이라기보다는 ‘학습’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데..... 지금 수료식을 준비하면서도 그렇고 모든 학습을 해오는 과정에서 ‘개인’으로 해왔던 학습은 얼마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중요했던 한 부분은 제게서 출발하는 것이지만요. 처음엔 음악을 한다는 건 제게 분노의 표출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없었던 데에 대한 허무함을 어떻게든 채우려고 했던 몸부림이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부터 춤을 추기 시작 했는데 그 때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비행소년의 모든 불만을 풀어주는 것은 폭력이었어요. 불만은 풀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가 다시 저에게 되돌아와 상흔이 되어갔어요. 그러다가 비보잉이라는 춤을 만나게 되었고, 그 격렬 했던 몸짓에 반해서 춤을 추기 시작했지요. 사실 음악을 느끼고 그것으로 뭔가를 표현한다기 보다 ‘탈출구’로써 사용 했었죠. 그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사실 보지 못했던 것일 거예요. 그러다가 마리학교라는 중등대안 학교에 편입을 했어요. 그 때에도 음악은 여전히 탈출구일 뿐이었지요. 사실 “예술가의 책” 이라는 수업을 듣기 전까진 모든 행위가 그래 왔던 것 같아요. 그러다 그 수업을 듣게 되면서 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뻗어나온 경험들을 제 방식으로 책에 담아 보았었지요. 처음으로 제 이야기를 담아낸 아트북을 만들어본 후에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고, 나의 행위들도 탈출구를 찾기보다는 문제에 직면하고자 했지요.
하자 작업장 학교의 죽돌로서 생활하게 되면서는 조금 더 많은 생각들과 고민들을 필요로 했어요. 특히나 저는 공연팀의 멤버인데, 팀이 우선시되는 공간에 있다보니 그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모두 다 자기 자신들의 문제로 가져 갈 수 밖에 없었죠. 제게 처음 다가왔던 ‘학습’이라는 것은 팀 작업 혹은 팀이라는 생명체와도 같은 까다로운 것을 알아 가는 것이었죠. 개인에서부터 시작하지만 팀을 거치지 않으면 의미 없었던 시간들을 보낸 것 같아요.
규연 말 끊어서 미안하지만, 그래서 포디에게 브라질음악이 뭐였다는 거죠? 제 말은 작업장학교에서의 ‘학습’으로서 말이에요.
포디 (웃음) 아. 참.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긴 하죠. 약간 정정하자면 우리는 혹은 저는 공연을 통해 학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사실 2년 동안 제가 해왔던 것은 <음악 =공연> 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브라질의 악기와 리듬과 노래들을 가지고 무대에 서긴 했지만 사실 브라질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지요 (웃음). 그 악기들을 칠 때 발산하게 되는 즐거운 에너지도 좋았고 무대에 섰을 때 관객들이 호응해 주는 것도 좋았어요. 그리고 가끔은 작은 악기를 가지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분위기도 좋았구요. 결정적으이미 공연팀에서 하고 있었던 것을 따라 간거라고 볼 수 있지요. 이왕 하게 된 것 열심히 가지고 놀아보자 라는 단순한 마음 이었던 거예요 (웃음).
규연 그럼 다시 한번 묻겠는데, 포디가 했던 음악, 학습이라는 것은 도대체 뭐였어요? 공연=음악 이다? 어쩐지 잘 이해가 안 가는 것 같은데요?
포디 중요한 질문인 걸 알면서도 어쩐지 대답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네요. 글쎄....“공연을 만들어 가는 것” 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무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 혹은 “기획”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하나의 공연을 만들기 위해서 생각해야 될 것 들이 많았죠. 사실 1,2학기 때는 촌닭들(촌닭들이 저희 공연단의 이름이었어요.)에게 공연은 활력을 파는 것이라는 생각 정도가 전부였지요. 어느 공연에 나가던, 전 웃고 날뛰면서 사람들에게 활력있는 이미지와 경쾌하고 빠른 리듬들을 들려주며 다니기만 했지요. 촌닭들의 슬로건은 ‘활력을 팝니다’ 였거든요. 그 때는 무대가 왜 웃어야만 하는 장소인지도 모르고, 마치 마약을 한 것 처럼 어떤 열기에 매료되어서 무조건 몰입몰입몰입 하는 곳 이었던 것 같아요.
3,4학기로 넘어오면서는 1,2학기 때 했었던 몰입몰입몰입의 열기도 점차 사그라 들고 무언가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음악적인 학습을 할 수 있는 장으로 공연을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공연을 제외한 학교의 프로젝트나 인문학 학습들과의 연결 고리를 조금씩 찾으려고 노력 했었어요. 생명평화결사대의 초청을 받아 그들의 마지막 걸음을 축하해 주는 공연을 했을때는 조금 다른 형식을 시도해 보았었지요. 이야기를 넣고 시를 넣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축복의 말 같은 것들을 공연에 하나 둘씩 넣어갔던 거예요. 그런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서야하는 무대가 어떤 무대인가를 고민해보고 공연은 어떤 마음을 움직여서 하는 것인지를 조금씩 배워갔어요.
그리고 Save My City 라는 주제로 작업장 학교 전체가 작업을 진행 했을 때에도 공연팀 역시 테마가 있는 공연, 슬로건을 내걸고 길에서 노는 것 을 해봄으로써 좀 더 학습과 공연을 연결 짓는 방식을 연구 했던 것 같아요. 이 공연들이 계기가 되어서 그 후의 공연들은 모두 저마다의 의미를 살리는 방법을 연구했지요. 결국은 공연 하나를 만들기 위해 했었던 고민, 준비의 과정, 공연을 하면서 행했던 액션들이 제겐 좋은 학습이었던 셈이죠. 이제 대답이 좀 되었을까요?
규연 음....조금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여전히 뮤지션이 되고 싶은 저에게는 나만의 세계가 담긴 음악을 만들지 못한 채 공연을 기획하거나 팀 안에서의 갈등을 고민하는 포디의 학습이 조금 낯설기도 해요.
포디 물론 규연이 생각하는 음악도 좋지만, 그러기에 앞서서 저는 어떤 준비의 과정을 해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규연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하고 싶어요. 포디는 ‘동료’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사실 ‘동료’라는 말을 쓰기까지는 어떤 과정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 말을 확실히 정의하기 까지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동료’라는 말속에 담겨있는 ‘같이’, ‘함께’ 의 의미까지도.....
포디 맞아요. 사실 내가 하자에서 학습했었던 것의 반은 ‘함께 한다는 것’ 으로 압축 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아요. 잘 설명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함께’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실은 많은 슬럼프 들이 있었어요. 시작은 2학기 중반쯤 이었던 것 같은데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학교를 자주 빠지게 되었어요. 어떤 자신감 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나 혼자서 뭔가를 해보겠다고 병원에 가서 매일 앉아 있었고, 하자에서 멀어지면서 내가 맞닥뜨렸던 문제는 팀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의 공백이었어요. 어쩔 수 없이 내가 아닌 다른 팀원들이 수습 해야 했고, 난 연락을 끊고 ‘개인적인 일’ 을 핑계 삼으며, 내가 구멍 낸 일들에 대한 책임 회피를 했지요.
규연 ‘함께’한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늘 ‘개인적인’일들과의 통합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지요.
포디 그 어려움에서 조차도 도망치고 만 것이 되어버렸지요. 그 때 쌓아 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난 어떤 것도 아닌 것만 같아서 괴로웠었어요. 그리고 또 그것들을 이야기하면서 나누어야 한다는 것도 너무 힘이 들었어요. 그저 ‘개인’적인 일로 이해해 주기를 바랬을 뿐. 그래서 팀원들과 많이 싸우고 결국엔 모든 것을 실토했지요. 그렇지만 무언가 해결 되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냥 그 상태를 유지하고 얘기한 시점에서 부턴 이젠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하는 것 자체를 조심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이 만들어져 버린 것이죠.
규연 그렇지만 늘 팀안에서 불편하고 조심스러운 상황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을텐데요? 그 이후에도 함께 공연을 하긴 했나요?
포디 머지않아 방방파티라는 학기말 쇼하자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같이 연주를 했어요. 신이나서 뛰어놀았지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쇼하자에 참여하면 안되는 거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2학기땐 학교에 나오질 않았으니 아무것도 한게 없었지요.... 그런데 그 방방파티가 나에게 어떤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고 만거에요. 내가 계속 열심히 하는 포디로 있을 수 있는 알리바이를 말이죠.
규연 그렇지만 듣고보니 방방파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이전의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포디를 받아들여준 팀원들에게 감사하면서 다음 학기를 준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 같아서 말이죠.
포디 그 말이 맞긴 해요. 그랬기 때문에 내가 지금 동료라는 것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으니까요. 방방파티가 끝나고 그 다음 학기는 만회와 재기의 학기였어요. 정말 열심히 했다고 생각해요. 그 때 처음 어떤 특별한 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고맙다고 생각했었던 때이기도 했지요. 열심히 할 수 있었던 힘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도 동료들 이었으니까요. 이때쯤 지난했던 연애도 끝이 나고 난 괜찮아를 연발하면서 학기를 열심히 보냈지요.
아쉬웠던 학기였어요. 너무 정신없이 빠르게 지나가기도 했었고 말이에요. 3학기를 열심히 보내고 나서 4학기 중반 또 한번의 참극이 일어 났어요. 마치 불행의 패턴이라도 있는 듯이 말이지요. 이번에도 내 자신의 문제가 아닌 내 주변, 그렇지만 내가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고 또 다시 학교에서 멀어지고 말았지요. 이번엔 일이 생기고 나서 바로 이야기를 했지만 어떤 대답을 바라고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여전히 난 힘들었고, 내게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묘한 감정까지 섞여 들어가면서 3학기 때 가지고 있었던 동료에 대한 생각을 다 잊고 말았어요. 이상한 글을 감정적으로 써버리고 수업도중에 하자를 나가버렸어요. 그대로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찾아가서 도움을 구했지요.
“내가 아는 긍정적인 임규연은 어디 간거지? 이제 곳 성인이 될테고 그런 일들은 니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겪게 될 것이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고 너의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니 어머니께 감사해라. 그리고 힘이 분명히 들것이지만 너는 너와 음악으로 공유하는 친구들과 같이 살고 있지 않니 그러면 주저 말고 나누고 같이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라(웃음)”라는 대답이 돌아왔지요.
규연 팀, 동료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같이 한다는 것은 뭘까요? 다시 한번 궁금해 지네요.
포디 간단히 말하면 내가 개인적인 일들로 힘들어 할 때 함께 고민해 주면서 고통을 좀 덜어주는 사람들 이지 않을까요? 그냥 믿으면 되는. 그리고 우리가 죽 공부했었던 이 시대에, 다르지만 비슷한 길을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규연 달리 생각하면 공동체... ... 가되는 건가요? 윽.. 갑자기 안좋은 기억들이 떠오르네요. 나는 오래간 공동체라는 것을 부정해 왔었는데....포디는 그것을 원하고 그것을 하자에서 정확히 경험하고 느꼈었던 것 같네요.
포디 슬럼프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으로 내 영역 넓히기라는 것을 고민했었어요. 영화 Go를 혹시 본 적이 있나요? 주인공인 이정호가 주먹을 쥔 채 팔을 앞으로 뻗고 자신의 영역을 한계를 아버지로부터 배우던 장면이 있어요. 이정호가 선택했었던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방법은 원을 깨고 밖으로 달리는 것이었지만 내가 선택한 나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주먹을 쥔 손을 펴고 다른 사람의 영역과 내 영역을 융화하는 것 이었어요. 그래서 그것으로 그 사람들과 내가 떨어질 때에도 내 영역은 줄어들지 않는 거지요. 참 서로 고마운 관계들이 아닐까 싶네요.
규연 이제 수료를 하게 되면 하자라는 공간을 잠시 나와서 포디의 동료들 모두가 각자 다른 시간을 살텐데... 아쉬워요?
포디 아니 아쉽지 않아요. 나는 우리의 시공간이 겹쳐있는 시간동안에 서로에게 들일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얼마나 오래, 얼마나 멀리 헤어지게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우리가 겹쳐지는 순간에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힘을 내야지요. (웃음)
규연 나는 늘 음악을 한다고 우기곤 해요. 그건 나의 존재증명같은 거기도 하고, 내 삶의 길을 내 줄 것이라 믿는 뭐..그런 것...같기도 하고요. 어쨋거나 음악도, 길도, 인생도 내가 만들어가야 하는 거겠지요? 그 모양을 조금씩 바꾸어 내면서, 인내심 있게 말이죠. 포디와의 대화 즐거웠어요. 그리고 수료 축하해요.
2009년 9월 1일 화요일
낯선 것을 마주하는 용기_유메
낯선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으로 늘 익숙한 패턴을 고집했었다. 그것은 꼭 학습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변화나 관계의 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곳에 떨어지는 것을 싫어했고 비슷한 방식의 관계 맺기를 반복해왔다. 그런 내가 10년 동안 고수해오던 학습의 공간을 벗어나 낯선 하자에 오게 되었다. 얼핏 보면 대단한 결심이라도 하게 된 것 같은데, 사실 별건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는 것을 한다고 하기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고(2006년 ‘놀자’프로젝트에 관심이 있었다.) 어쩌다보니 길찾기 과정에 턱하니 붙어버려서 얼라리요? 하고 자퇴서를 제출했다. 어? 어어? 하다가 정신 차려보니 하자였다.
나는 별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하자 생활에 적응했다. 그것은 적응했다기보다는 하자를 내 입맛에 맞게 받아들인 것 같은데, 수료 에세이를 쓸 때쯤 되어 전체를 뒤집어보니 정말 그랬던 것 같다. 언제나 익숙한 것을 찾는 습관은 꽤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항상 열심히 했고 내가 잘 못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내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그게 잘 안되면 그래, 이건 나한테 안 맞는가 보다. 하고 스스로 타협(이라 쓰고 포기라 읽는다)을 봤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그 것으로 인해 내게 주어진 또 다른 방향들을 스스로 걷어내고 잘라냈던 것 같다. 길찾기 때는 노리단이 그런 경우였고 1학기 때는 TOT가 그런 경우였다.
길찾기에서 주니어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팀(매체)을 선택할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영상은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낯선 매체였고 디자인은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가장 익숙한 매체였다. 나는 다시 디자인을 선택했다. 하지만 내 선택임에도 마음 한 구석은 어딘가 편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자꾸 “나는 너무 익숙한 것에 길들여져서 그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고민해도 물음은 늘 제자리에서 빙빙 돌뿐이었다. 아마도 진짜로 답을 알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정말로 그게 궁금했다기보다는 익숙한 것을 쫓는 자신에 대한 불안감이나, 일종의 변명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그 순간 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자 방패 막이었다.
1학기 때 했었던 드로잉 프로젝트와 그림책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쉽게 관심을 주고 재미를 붙였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동물과 생태, 환경에 대해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생각해가며 작업해야 했던 TOT는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었고 잘 모르는데다가 관심까지 없었던 주제를 마주해야 했다. 덕분에 당시 프로젝트 담당 판돌이었던 테디는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하셨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끝까지 왜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우리들로 인해 두 손 두발 다 드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패턴은 2학기 때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2학기 때 새로 깨달은 사실은 관심이 있다고 해서 모두 끝까지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학기 때는 대규모의 공동 작업을 했다. 캐치스코프와 TOT가 모여서 열린 작업장 PV를 만드는 일을 했다. 기존의 하자작업장학교 PV로 쓰이던 고래이야기가 하는 이야기와 지금의 작업장 죽돌들이 하는 이야기는 또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업의 초반부터 ‘비디오의 형태는 애니메이션으로 갑시다.’ 라고 이야기 했고 작화와 관련해서 캐치스코프 쪽에서 TOT에게 공동 작업을 제안 해왔다. 총 열 명의 제작진이 모여서 함께 작업했다. 원래 예전부터 애니메이션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기도 했고, 영상이라는 매체가 나에게 있어서 꽤 흥미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초반에는 꽤 들뜬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들뜬 마음과 설렘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기 싫어, 어려워, 못해! 로 변신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라고 변명했지만 사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뿐이지.
대부분의 이유는 하나같이 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음에 있었다. 작업은 대다수의 인원이 함께 했던 만큼 생각처럼 쉬 되지 않았고, 서로의 의견을 조율해 나가는 과정도 더뎠다. 머리가 많으니 생각도 의견도 가지각색이었다. 뭔가 의견이 있어도 대부분 우물쭈물하다가 말 할 타이밍을 놓쳤고 그리고 나면 성에 차지 않는 의견들로 결론이 났다. 나는 이런 회의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누군가 내 의견을 물어봐 주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그런 회의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혼자가 아니었다. 회의시간이 길고 지루했다. 처음 해보는 대규모의 공동 작업은 어려웠고 맘대로 되지도 않았다. 잘 해야 하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으니 짜증만 늘어갔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서로를 일일이 빠뜨리지 않고 챙겨주고 배려해 주기란 굉장히 어려웠다. 작업에 대한 어려움이 늘어가고 작업이 생각대로 되지 않자, 나는 점점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집에는 함께 작업할 사람도,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 작업에 대해 싸그리 잊고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 집으로, 집으로 기어 들어갔다. 몇 주 동안은 하루의 일정이 끝나면 잽싸게 귀가했고, 그렇지 않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이대나 홍대거리를 배회했다. 학교에서의 작업은 하자 정문을 벗어나는 순간 끝이 났다.
하기 싫은 것, 내가 못하는 것에 대한 투정으로 울상이던 내 얼굴은 거기 둔 채 주니어 3 학기가 찾아왔다. 새 학기와 함께 주말영상학교도 시작했다. 주말영상학교는 세이랜의 추천으로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해보고 싶었던 거고, 또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마침 하라니까 했다. 많이 생각 할 것도 없이 아주 조금만 더 생각해 봤으면 세이랜이 왜 내게 주말영상학교를 권했는지 금방 알았을 텐데, 그 때에는 그 조금을 생각해 볼 생각조차 못했었다. 주말영상학교는 시작부터 굉장히 두근두근했다. 예전부터 디자인과 동시에 하고 싶었던 작업이기도 했고 일종의 동경도 있었던 것 같다. 막연히 ‘신식 매체’ 같다는 느낌으로. 낯선 용어들과 카메라를 만지며 우와, 우와 감탄사를 연발했다. 너무너무 신기해서 밤에 잠도 안 올 지경이었다. 집과 학교의 명확한 경계를 흐리게 한 것 역시 주말영상학교였다. 집으로 가는 길과 잠자리에 누워 잠이 들기 전 시간의 대부분을 이번 주 주말에는 뭘 찍을까 고민하는데 썼다.
처음 카메라를 들었을 때는 ‘이 신기한 도구를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고 말리라!’는 의욕에 불타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뛰어나가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찍었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는 ‘반드시 잘하고 말겠다!’는 의욕에 불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문장에 오류가 있음을 깨달았다. 원 씬 원 컷으로 연습의 흔적이 보인다고 칭찬 받았던 나는 세 컷 프로젝트에서 미술에만 신경 썼을 뿐 연출이 전혀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왜 처음 접하는 매체에서 잘 해야 하는데? 좀 못하고 어수룩하면 안 되나? 좀 어설프더라도 꼼꼼히 잘 챙기고 배워 나가야 하는데 어서 ‘잘’하고 익숙해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낯선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 잘하지 못하면 못 할까봐 불안하다. 실수하고 못하는 것은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싫어했다. 무언가를 골머리 썩고 쓴 소리 들어가며 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야 하는 것이 답답하고 속이 터졌다. 세이랜은 나의 그런 모습 때문에 주말영상학교를 경험해 보는 것을 추천해 주셨던 것 같다. 나는 디자인과 드로잉이 ‘이것이 정말 내 매체고 언어다!’, ‘드로잉과 디자인이 아니면 안 된다!’ 해서 그것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나한테 있는 자원이고 이미 오랜 시간 익숙해져 있고 그 것 외에 다른 것은 ‘아마도’ 재미가 없을 거고 잘 하지도 못할 테니 그 것만 고집하는 것 이다. 익숙한 것에만 매어있지 말고 새로운 것에 대해 도전하고, 생각 하는 법을 배우길 바라셨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당시의 나는 스스로의 문제점도 몰랐을 뿐더러, 당연히 문제를 모르고 있었으니 고칠 생각 역시 전혀 하지 못했다. 주말영상학교의 마지막 과제인 단편영화를 제작할 때에도 내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를 꺼내서 풀어 놓았다. 이것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왔는지, 대체 무엇이며 왜 나타났는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은 채로 그냥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쉽게 가져다가 쓰고 카메라를 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사이>였다. 큰 고민 없이 호박처럼 굴러들어온 이야기는 좋은 소식들도 가지고 들어왔지만, 지금까지 직접 부딪히지 않았던 문제들과 미뤄왔던 고민들을 한꺼번에 우르르 몰고 들어왔다. 정말 말 그대로 ‘호박이 넝쿨 째’였다. 그 호박이 썩은 호박인지 단 호박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영화 <사이>는 이듬해 봄, 여성영화제에 출품되어 꽤 호평을 받았다.
영화제에 영화가 출품되고 나서, 처음에는 무작정 좋고 기뻤다. 다음 학기에 영화를 찍겠다고 다짐한 것도 거의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작정 좋고 기쁜 것은 뒤로하고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 영화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하지? 다짜고짜 ‘그 분이 오셨습니다. 그냥 feel 가는대로 확 찍어봤어요.’ 따위가 먹힐 리가 없었다.(먹혀서도 안됐지만) 이것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왔는지, 대체 무엇이며 왜 나타났는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는 채로 영화를 찍었고 카메라를 놓는 순간 작업도 같이 끝내버렸으니 겁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나에게 가장 익숙한 것들을 꺼내서 찍은 것 뿐 인데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영화를 찍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고 정리 해 뒀어야 할 것들을 놓고 그제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4월 중순, 드디어 여성영화제가 열렸다. 계속 자연스럽게 나오던 이야기들과 어디서부터 왜 나타난 건지도 모르는 익숙한 이야기들. 그것들에 대해 싫어도 품어야 할 의문들을 품고 억지로 질문해나가다 보니 어느새 진심으로 궁금해졌었다. ‘너, 어디서 온 거니?’ 여성영화제에 있을 관객과의 대화를 준비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답했다. 관객들이 어떤 질문을 할까? 내가, 나의 영화와 함께 만나게 될 낯선 관객들의 모습을 상상하자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영화가 완성되고 하자 내부에서 상영되었을 때 가졌던 관객과의 대화시간의 단 한명의 질문자와 그 질문을 기억한다. 당시 운영부에서 근무하시던 ‘바다’라는 판돌이었는데 상영이 끝나고 그렇게 물어보셨다. “이 영화에서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나요?” 말문이 콱 막혔다. 특별히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그냥.. 나는 보여줬으니까 받아들이는 건 관객의 몫, 이라며 무책임하게 내팽겨 쳐 뒀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지금부터 생각해 볼게요.” 라고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대답은 해야 했기에 대답은 했다. 대충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을 짜 맞춰서 횡설수설 하는 것으로 대답을 마쳤다. 왜 내 영환데 나도 몰라?! 그 사실이 충격적이었고 관객과의 대화 때 횡설수설한 내 모습이 너무 쪽팔려서 또 한 번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나서도 진지하게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었다. 대충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던 것을 정리해 보고 그게 답이겠거니, 어영부영 또 넘어갔었다. 아마도 다시는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서 나온 몹쓸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성영화제에서 내 영화가 상영되면서 관객과의 대화라는 무시무시한 자리가 또 다시 만들어 졌고, 이번에는 똑같은 실수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시기 늦은 고민들을 얼싸안고 끙끙거렸다. 그러고 나서 맞은 관객과의 대화는 다행스럽게도 순조롭게 잘 진행 되었다. 뒤늦게나마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고민했던 시간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여성영화제는 내게 또 한 번의 기회와 함께 큰 격려를 주었던 경험이었다. 내 영화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자상하고 다정한 관객들을 만나면서 영화는 단순히 눈에 보여 지는 시각효과가 아니라 내 입이고 말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두 번째 영화 <열 아홉>을 만드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 영화, <열 아홉>은 절대 <사이>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사이>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고 골머리를 썩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어떤 시나리오를 쓰고 어떤 아이템을 가져와도 항상 쓰고 나면 <사이>가 되어있었다. 계속 <사이>의 굴레를 벗어나질 못하고 쳇바퀴 돌 듯 그 안에서 계속 빙빙 돌았다. 이대로는 무엇을 써도 계속 똑같은 이야기만 하겠다 싶었다. 다시 한 번 <사이>로 돌아가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능력들에 대해 아무런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배척해 버렸던 시간을 뛰어 넘어 낯선 카메라를 잡았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매체를 접하고 새로운 것을 접하면서 그에 따른 공부와 사고의 영역도 넓어져야 했는데, 게으른 건지 나르시시즘인지(아마 둘 다인 것 같다.) 나는 새로운 매체를 들고 또다시 나를 향해 돌아왔다. 내 안에서 빙빙 돌던 이야기를 끄집어 내 <사이>를 만들었다. 두 번째 영화 역시 내 안에서 찾으려고 했다.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재는 ‘나’였고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것 역시 ‘내 얘기’였다. 계속 시선을 밖으로 두지 않고 안으로만 살폈다. 더 들어오는 무언가도 없었고 빠져 나간 무언가도 없었다. 고여 있는 물처럼 가만히 있으니 아무리 탈탈 털어도 계속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 이다. 이때가 되어서야 문제점을 깨달았다.
나는 나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는 것들에 무관심 하다. 크게 신경 써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사회의 뉴스나 기사거리에 대한 소식이 느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인데, 새로운 것이나 학습을 다른 영역으로 확장 시켜 나가는 것이 그런 뉴스 소식을 접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뭐 큰 지장 없는 것. 내가 직접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해 배우고 공부하는 것을 그냥 ‘지적 허영’ 같은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내 할 일만 잘하고 내 것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편협한 생각이 내 발목을 잡았다.
영화 <열 아홉>은 그런 편협함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나온 영화였다. 계속 반복되는 <사이>의 틀을 깨지 못하고 빙빙 돌면서 이 이야기들이 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를 찾았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내가 신경 쓰고 생각해 왔던 문제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계속 익숙한 것을 끌어다가 쓰고 있었다. 다른 것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들도 내가 공감할 수 없었고 몇 줄 쓰지 않아 금세 막히고 말았다. 왜냐하면 나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또 다시 나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익숙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계속 익숙하게 보아왔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찾기로 했다. 늘 과거를 이야기하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현재의 나를 찾았다. 지금의 나. 지금 내가 놓여 진 상황과 가지고 있는 고민들과 바라는 것들까지. 그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무엇을 써도 자꾸 현재가 아닌 과거로 돌아가고, 돌아가고, 돌아가고.. 솔직하게 지금 눈앞에 놓여 진 내 상황과 고민들을 마주보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내가 보낸 시간들과, 내가 취해온 행동들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열 아홉>은 그런 의미에서 내게 <사이>와는 또 다른 큰 의미가 있는 영화였다.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를 들고 내 이야기를 담아 나오는 대로 지껄이던, 처음으로 말문을 튼 영화가 <사이>였다면 <열 아홉>은 그것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했던 영화다. 처음 카메라를 들었던 그 때처럼 무작정 내 할 말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이 어떻게 읽고 보는지, 그리고 나는 내 영화를 어떻게 읽히고 보여주고 싶은지 까지도 책임을 가지고 연출 해 나가고 싶었다. 내 영화라고 해서 오직 내 할 말들과 100%의 나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내 안에 갇혀 빙빙 굴러봤자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거울이 아닌 세상을 봐야한다. 거울만 바라보던 내게 거울 너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 할 때,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이 시작된다. 또 다른 것을 내 안으로 들이고 품고 있던 것 중 어떤 것은 흘려보내야 한다.
에세이를 쓰면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기억은, 2학기 때 캐치스코프와 TOT가 모여 함께 만든 열린 작업장 PV를 전체 상영 후 히옥스가 하셨던 말씀이었다. PV의 내용은 각자 성격이 다른 세 명의 주인공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뤄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인데 그 안에서 주인공들은 직접적인 방법들에 모두 실패하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전혀 엉뚱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게 된다. PV를 본 후 히옥스가 하신 말씀은 이런 내용이었다.
‘하나의 목적을 두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돌아서만 가지 말고 그것에 끝까지 부딪쳐 돌파해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당시에는 아아, 그런 것이 필요하구나. 그렇지. 하고 끄덕끄덕 넘어갔었는데 지금에 와서 자꾸 다시 생각나는 이유는 나의 2년 반을 돌아보며 그건 정말 내 시간들에 필요한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의 2년 반의 시간 동안 그런 도전이 있었던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자작업장학교에서 평생 꿈도 꾸지 못했던 학습의 방법들을 경험했다.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고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카메라를 든다. 공부는 책상 맡에서 연필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늘 익숙하고 힘들지 않은, 내 ‘적성에 맞는’ 학습 방법만 골라내던 나쁜 편식습관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여전히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다. 하지만 더 이상 2년 반 전처럼 하기 싫으니까 재미도 없고 힘만 들 거야. 라고 처음부터 선을 그어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없을 것이 뻔한데도 자꾸만 하고 싶어지는 공부들이 늘어난다.
카메라를 들고서 부터, 이전에는 막연하기만 했던 수료식 이후의 목표가 생겼다. 더 크고 다양한 세계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소통하고 싶다. 이야기를 꺼내면 거기에 화답해줄 관객들을 더 많이많이 만나고 싶다. 아기들이 ‘아바’나, ‘마마’ 같은 어눌한 발음으로 첫 단어를 떼었다고 해서 ‘이제 말을 할 줄 압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거기서 멈추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겨우 입을 열고 첫 단어를 내뱉은 셈이다. 좀 더 뚜렷하고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보아야하고 더 많은 소리와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기까지 2년 반이라는 시간을 하자에서 지내왔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했다. 종이 위에서 그려지던 이미지들을 프레임 위에서 또 다른 형태의 이미지들로 만들어내고 있다. 카메라 대신 책을 든다고 해서 카메라를 다시는 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아주 만약에 내가 카메라를 다시 들지 않는다고 해도 카메라를 들었던 시간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들은 다만 모양이 바뀔 뿐, 또 다른 시간 위에 살처럼 붙어 내 역사를 풍성하게 한다. 계속 다른 형태를 취하면서 학습을 지속해 나가고 학습의 지형을 끊임없이 수정, 보완 하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을 배우며 사유하고 인식했던 것들이 카메라를 들 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기억한다. 카메라를 통해 나는 이제 막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고 그것에 더 큰 힘과 깊이를 심어주기위해 이제 또 다른 형태의 학습을 시도하기로 했다. 무엇이든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이 어렵다고해서 피하고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서는 ‘힘’을 만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더 이상 낯설고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타협을 보지 않는다. 카메라를 잡을 때 드는 고민과 수많은 어려움이 어떤 형태로든 내게 남아있기를 바란다.
(in)visible: 보여 지는 것 너머_토토
1. Prologue
만화책이나 영화 같은 데 보면 항상 신비스러운 캐릭터가 나온다. 학교에서는 존재감도 없고 평범하지만 사실 다른 곳에 가서는, 혹은 자기 방안에 있을 때는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 나는 그런 캐릭터이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대단한 것이 없었다. 잘하는 것이 많고 싶었는데 모든 걸 적당히 하다보니까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내 캐릭터가 서서히 무너져갈 때쯤 아빠가 6mm 비디오카메라를 쥐어주면서 하자에 가서 영상을 배워보라고 했다. 비디오카메라와 영상 그리고 하자는 아무것도 없던 나에게 그 뭔가 대단한 것 같았다.
영국에 있을 때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다. 아마도 지나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와 평범한 2층 집에서 사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서였던 것 같다. 길을 걸어갈 때도, 학교를 돌아다닐 때도 배경에 전혀 묻히지 않고 존재감이 너무 확실한 내가 너무 싫었다. 튀지 않고 적당한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격도 너무 조용하지도 않고 떠들썩하지도 않게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평범한 척 하면서 4년을 보냈고 한국에 돌아왔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애들 사이에서 나는 그렇게 바라던 대로 전혀 튀지 않았고 존재감도 없었다. 영어시간만 아니면 그랬다. 영국에서 편입 왔다는 얘기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별명이 ‘영국’이었고 영어 선생님은 날 괴롭히는 걸 좋아했다. 매번 영어지문을 읽으라고 시켜서 3학년 때는 한국 발음을 터득해 콩글리시로 읽었다. 영국에서는 평범한 애가 되고 싶어서 영어를 배웠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에 오니까 영어 때문에 튀는 애가 되어버렸다.
2. 문을 열고 스크린 앞에 서다
길찾기 시절은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말 할게 없을 정도로 남들에게 묻혀서 지냈다. 노리단, 합창, 나를 찾아가는 여행 등 별로 관심이 안가는 프로젝트들을 최대한 눈에 안 뛰게 참여하면서 한 편으론 빨리 주니어가 되서 영상방에 들어가길 바랐다. 길찾기 과정을 마무리하는 담임들과의 평가 테이블에서 귀는 우리 엄마에게 “토토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한데 사실 토토가 저희 반인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그 만큼 걱정 안 끼치고 자기가 할 일은 알아서 다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라고 말했었다.
존재감이 없으려면 우선 남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자기 할일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줄 알아야 하고 남 일에 참견해서도 안 된다. 나는 누구에게 다가가지도 다가오게 하지도 않으면서 그 경계에서 늘 무관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니어가 되고 캐치스코프라는 영상팀에 합류했다. 허브, 유란, 뿡, 베이, 나캉, 름사, 나마, 보라, 제이미, 케이 그리고 판돌 유리를 만났다. 혼자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갑자기 동료 작업자라며 다가온 이 많은 사람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걱정 안 끼치고 할 일은 알아서 다 하던 길찾기 시절의 토토는 나이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굉장히 작게 느껴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떨리는 내 목소리가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질문을 계속 회피할 수만은 없었다. 캐치스코프의 영상작업은 내가 미지근하게 참여하면 전체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도움은 못 줄지도 모르지만 방해는 되지 말자”가 나의 신조였지만 마음 속 깊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하지만 이 마음에 대한 동기는 지금까지에 비해 사뭇 달랐다. 자존심이 아니라 다른 캐치스코프들에게 인정받고 그들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태껏 나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 내가 존재감 없이 있으면 걱정해주고, 끊임없이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라고 손짓하는 사람들이었다.
길찾기 때와는 달리 나의 칼퇴근은 점점 줄어갔고 하자의 107호 영상방은 내 방보다 흥미로운 곳이 되었다. 영상에 비범한 잠재력이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캐치스코프와 Focus On: Interview 프로젝트를 하면서 영상은 노력한 만큼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인터뷰이였던 이언희 감독을 내가 진심으로 사모해야지 관객들도 그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달 정도의 작업 기간을 거쳐 인터뷰 프로젝트는 완성되었고 11월부터 첫 개인 작업을 시작했다.
막상 개인 작업은 시작하기에 앞서 두려웠다.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대신 얘기해주고 어려운 얘기를 쉽게 설명해주는 의지할 사람들이 없어진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동일하게 하고 싶은 얘기, 의견을 모아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얘기’,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었다. 내 얘기를 주제로 삼으라고 했을 때 처음 떠오른 것은 캐치스코프를 만나면서 겪은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혼자 웅얼거리고 하고 싶은 말을 남들의 무거운 시선에 눌려 끝까지 참고 버티던 내가 조금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 더 이상 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엄격한 규칙들 속에서 답답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한 발짝 나온다는 것은 내가 내 자신으로 부터 한 발짝 자유로워지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 내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숨고 싶어 하던 나의 모습이라고 해도.
같은 얘기여도 마이크를 잡고 말로 하는 것과 영상으로 만드는 것은 달랐다. 나를 돌아보고 분석하는 과정은 훨씬 길었고 내 영상을 볼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게 전달해야 했다. ‘내가 말을 했다’에 집중하고 있었던 나에게 듣는 사람을 고려하게 된 경험은 소중했고, 날 것으로 보여주기보다 내 의도를 살릴 수 있다는 영상의 특성에 매력을 느꼈다. 영상방에서의 첫 학기는 영상이 내 표현의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앞서서 내가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캐치스코프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3. 문 앞에서 만난 사람들
이제 막 내 안에 잠겨있던 문을 열고 나왔더니 그 앞엔 허브와 유란 그리고 새로 들어온 한결이 있었다. 유리와 다른 20대들은 나에게 10대 팀장을 해보라고 제안을 했다. 학교 다니면서도 한 번도 반장, 부반장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선거 같은 건 관심도 없었고,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 제안은 문을 열고 나왔다는 성취감에 빠져있던 나에게 문하나 연 걸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로 다가왔다. 허브와 유란과 내가 처음 영상방에 들어왔을 때 각각 너무 다르고 친하지도 않아서 유리는 걱정되는 마음에 일부로 우리 셋을 묶어놓는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허토란’에서, 그리고 107호에서 나는 어떤 존재이고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길찾기때 자기가 맡은 일은 잘해오던 나는 더 이상 나 혼자만 잘하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됐다. 같이 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내가 만약 좀 일찍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팀장이었을 때 내가 가장 자주 했던 건 과제 공지였을 거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독촉하려면 내가 이 말을 할 수 있게 과제를 먼저 끝내야 했다. 늦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선 내가 늦지 말아야 했다. 1학기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성실히 했다면 2학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자고 말하기 위해서 성실했다. 팀장은 전체를 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전체를 보려면 절대 자기 자신만의 문제에 빠져있으면 안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 나를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했다.
어떤 곳에 처음 와서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했는데, 내 경우를 되짚어 보면 캐치스코프에서 함께 영상을 만들면서 내 의견이 반영되는 것을 보았고, 나에게 기대를 걸어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었다. 사실 정확히 따져 보려면 처음 만나서 그 우물쭈물 거리던 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말 잘 못해도 “괜찮다”, “기다려 줄께”라고 말했던 사람들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첫 학기에 캐치스코프들이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주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팀장이었는데 그때서야 나도 팀의 일원이란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너와 내가 경쟁상대가 아니라 서로가 힘들 때 의지가 되어 주고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작업동료라는 것을. 팀, 코멘트 그룹, 동료 작업자 등의 이름 아래서 ‘간섭’과 ‘방해’같은 것은 더 이상 기분 나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내가 이런 것을 주도 하는 사람인 팀장이 되어갔다.
4. 배움과 실천을 동시에
나는 또 다시 새로운 학기를 맞이했고 3학기가 되었다. 내가 2학기였을 때 생긴 ‘길드하자’라는 모임은 주니어 3학기 이상의 죽돌들이 하자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체가 되면서 다른 죽돌들도 함께 이끌어 가고 싶은 마음이 모인 그룹이었다. 전 학기 때 길드 모임을 시작했던 뿡의 행적을 따라다니며 관찰하고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은 나는 당연히 참여하고 싶었다. 사실 새로 만든다는 게 더 정확했다. 뿡, 나르샤, 엽, 가람, 오드리 등 길드를 이끌어가던 죽돌들이 3학기를 마지막으로 수료를 해버렸고 자연스레, 3학기인 나는 말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주도적인 사람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107호 안에선 1년 동안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말해도, 많이 말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107호 밖으로 나가서 허브, 유란, 한결이 아닌 다른 50명의 죽돌들 사이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되는 건 쉽지 않았다. 원래 대인원에 대한 공포증도 있었고 “쟤 왜 나대” 라는 말은 더욱이 듣기 싫었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프리스쿨 때 우리는 무성영화를 만드는 미션을 받았다. 각본, 세트, 음악, 폴리, 촬영, 편집 등 모든 것을 우리 손에서 해결해야 했고, 시간은 3일 밖에 없었다. 지체할 시간 없이 빨리 시나리오를 써야 했는데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말 할까 말까 갈등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조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화장실 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3일 동안 영화 한 편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찍어야 하는데 진척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하루에도 수십 번 뿡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3학기가 뭐 길래. “3학기니까…….” 어쩌고 하는 말들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마음 같아선 나도 내빼고 누군가 앞에 나와 주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지난한 침묵 속에서 나는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3학기이니까”라는 말은 모두가 3학기가 되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요구사항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있고 보이는 것을 못 본 척하지 말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날 3학기들을 불러서 얘기를 했다.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상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우리가 먼저 앞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라고. 나 혼자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죽돌들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PD 역할을 맡았던 속눈썹, 음악과 폴리를 담당해준 공연팀의 왕양, 포디, 진, 환, 마니. 미술팀을 이끌어갔던 유메, 제이, 그림자. 편집의 유란, 조연출 허브, 촬영 한결.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 위치에서 다른 죽돌들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드디어 우린 영화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3학기가 되자 드디어 그 동안 내가 경험하고 받아들인 것들을 밖으로 내보여야 하는 시기가 왔다. 언제까지 좋은 것만 보고, 말하지 않으면서 듣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뿡이 떠난 시점이 바로 내가 밖으로 나올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없고, 때문에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할 수 없다. 내가 보이는 것만큼 행동하고, 차차 내게 닥쳐오는 것들을 부딪혀보면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배우고 있어요.“ 내지는 ‘아직’이란 단어를 붙여 말하는 모든 것들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배우는 시기, 행동하는 시기가 나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의견을 말하고, 주도하는 등의 역할을 해야 되는 때가 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시간을 유예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리스쿨을 계기로, 내가 유예하는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항상 불안할 것이라고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 할 거면서 한쪽으로 계속 조마조마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일단 부딪혀 보기로 결심했다.
프리스쿨의 경험을 빌어 3학기를 중심으로 길드가 구성되었다. 주니어 과정인 열린작업장의 변화와 함께 전체가 하나로 움직이는 프로젝트들이 많아졌고 나도 107호 밖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갔다. 107호 밖은 내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보니 내가 속해 있는 더 큰 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열린작업장이라는 팀에서는 팀원도 많았지만 팀을 이끌어가고 싶은 팀장들도 많았다. 괜히 처음 보는 대인원에 대해 겁을 먹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길드를 하면서 확실히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 나와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찾았고, 내가 나를 믿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줄 수 있게 된 것 같다.
5. 숨기고 싶은 것을 인정하기
영상을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내가 분명히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을 가지기 까지는 카메라를 다루는 법에서 부터 매 학기 한 편의 영상물을 만드는 것까지,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노력하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영어는 내가 선택해서 잘하게 된 것이 아니다. 우연히 어렸을 때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었고 특별히 영어가 좋아서, 언어가 좋아서가 아니라 적응해야 됐기 때문에 배울 수밖에 없었다.
일반학교를 다닐 때 영어를 잘한다는 것에서 받은 주목은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일단 사람들은 내가 유학을 갔다 왔다는 사실을 우리 집이 돈이 많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차라리 사실이었으면 했다. 둘째, 영어를 잘하면 똑똑하다? 모범생이다? 차라리 이것도 사실이었으면. 나는 학교에서 잠만 자고, 시험을 잘 보는 것도 영어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다른 애들은 나 때문에 영어 등수가 떨어진다며 불평했다. 자연히 중학교 3년 동안 이런 편견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는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하자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쫓아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한 번 영어밖에 못하는 애가 되긴 싫었다. 이런 나에게 글로비시에 대한 제안은 굉장히 고민되는 것이었다. 다른 죽돌들에게 영어 수업을 하라니…….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것, 하고 싶은 영상만 고집하고 다른 건 일체 안하겠다는 것도 이기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은 없었지만 영어에 도전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글로비시와 영어의 차이점, 글로벌 잉글리시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1년이 걸렸다. 하지만 계속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던 ‘영어’와 차별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불어나 일본어를 배울 때처럼, 글로비시를 새로운 언어라고 생각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나도 배우는 입장이 될 수 있었다.
하자에서 배우는 입장은 심리적으로 가르치는 입장보다 훨씬 쉽다. 내가 간절히 배우고 싶은 것만 있으면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책으로 공부할 수도 있고, 같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모임’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항상 ‘배우는 중’이기 때문에 누구도 나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얻어가는 것도 자연히 늘어난다. 하지만 반대로 가르치는 입장이 되는 것은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그것을 남들과 공유하길 선택했을 때는, 남의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도 해야 하며 다른 죽돌들이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 등을 고민하는 수업준비도 해야 한다.
글로비시 프로젝트는 이런 점에서 다르다. 예전엔 나 혼자 영어를 너무 쉽게 배운 것 같아서 또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괜히 칭찬을 받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글로 비시에서 나는 사실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고, 수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2년이 지난 지금, 글로비시 프로젝트에 도전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하자 투어를 영어로 해야 될 때 전날 잠을 설치지도 않으며, 즉흥적인 상황에서 통역하는 것도 마냥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내가 어딘가에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성취감을 준다. 성취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는 항상 묻어두고 싶은 장기였지만 글로비시를 하면서, 말하고, 쓰고, 읽는 것 뿐 만아니라 통역, 수업과 같은 다른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주목, 선택하지 않은 능력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지금도 수료에세이를 쓰는 동시에 다음 학기 글로비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무언가에 대한 공부가 끝없는 것처럼 공부의 교제를 만드는 글로비시 프로젝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끝이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 학기 더, 시니어로서 리사와 함께 글로비시 프로젝트를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6. 안과 밖의 경계 위에서
주니어 3학기 때 하자 마당에 컨테이너가 들어왔고 우리는 ‘컨테이너 어페어‘라는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작업하시거나 연구하시는 분들을 초대해서 특강을 듣거나 함께 토론을 하면서 도시에 관한 우리의 사유를 넓히고나 한 프로젝트였다. 가장 기대하기도 했었고, 인상 깊었던 강의는 [상계동 올림픽]을 만드신 다큐멘터리스트 김동원 감독님의 강의였다. 그때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닌 이야기를 다룰 때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어떻게 관점을 만들어나가나요?” 당시 우리에게도 한 가지 공통의 주제가 있었다. ‘Save My City’, 예전부터 도시에 대해 관심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이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선 자신만의 동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야했다. 김동원 감독님은 내 질문을 꿰뚫어 보셨던 것 같다. 굉장히 심플하게, “여러분이 어떤 것에 대한 영상을 찍던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지금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세요.”라고 하셨다.
Save my city는 주니어 과정의 모든 죽돌이 네 팀으로 나뉘어 서울이라는 도시와 그 근교의 신도시까지를 탐험하면서 현재 도시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과 이야기 거리를 작업화 해 보는 프로젝트였다. 도시는 내 짧은 인생의 대부분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지만 정작 이렇게 오래 관찰하며 걸어본 적은 없었다. 우리는 마치 서울에 처음 상경한 사람처럼 무리지어 다니며 눈에 띄는 것들은 모두 카메라에 저장했고 몸이 이끌리는 곳을 따라 무작정 걸어 다녔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처음 발견한 사람‘, 하지만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팀이 만든 [Wavy City]라는 영상물 속의 물고기가 도시 생활에 적응해버려서 깨끗한 물을 찾아도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당장 시골에 내려가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물고기는 우리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였다. 재개발이 되는 도시 한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것을 선동하는 사람도 아닌, 직접적인 피해자도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물고기라는 캐릭터를 통해, 뿌리 내릴 수 있는 곳에 대한 작은 소망과 미미한 영향이지만 우리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만약 ‘Wavy City’를 혼자 만들었으면 그렇게 부지런히 밖을 걸어 다니지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혼자 방안에 앉아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며 나의 정체성은 도대체 뭘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팀으로서 공통의 경험을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만들고 ‘모아야’ 했기 때문에 움직이면서 생각하길 택한 것이다. 도시, 또는 ‘밖’은 항상 있지만 내가 들여다보길 선택하지 않으면 항상 ‘안’과 ‘밖’으로 분리될 것이고 비록 도시에 살고 있지만 나는 유령 같은 존재일 것이다. 카메라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도구에서 밖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그렇게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을 때, 때론 한 발짝 떨어져 봐야 하고 때론 내가 카메라에 나올 정도로 가까이 갈 수 있어야 한다. rec을 눌렀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되는 것처럼 rec을 누르고 어딜 향해 비출 것인지 매 순간 스스로 판단 할 수 있는 자기 확신이 필요한 것 같다. 김동원 감독님이 12년 동안 비전향장기수 할아버지들과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완성한 [송환]처럼 나에게도 내 카메라를 들고 오랫동안 몰두 하고 싶은 주제가 있는지 고민하게 됐다. 12년을 정확히 약속할 수는 없지만 ‘도시’라는 주제를 계속 탐구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특징들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 말이다.
7. 세상을 넓혀준 카메라
주니어 4학기, Save My City 때의 작업을 이어가야겠다는 다짐으로 그림자와 함께 '999 City'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림자와 나는 이유는 달랐지만 각각 999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모티브 삼아 움직였다. 나에게 999는 119와 같은 숫자였다(영국에서는 119가 999이다) 따라서 ‘999 City’는 위기의 도시라는 의미였다. ‘기후변화시대를 직면한 창의적인 십대들’, ‘창의성 위기의 삶을 만나다’ 등, 특히 ‘위기’와 ‘시대’라는 단어를 많이 접한 학기였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위기라고 동의하던 동의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위기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위기를 마주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게 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한 곳을 정해 필드워크를 나갔다. 그림자는 공책과 펜을 들고, 나는 카메라로 기록을 했다. Save My City 때처럼 아이디어가 샘솟길 기대했던 걸까, 더 깊이 고민한다는 게 두려웠다고 해야 될까, 순식간에 몇 주가 흘러가고 창신동, 공덕동, 여의도, 문래동, 한강, 여러 곳을 다녔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내심 알고 있었듯이 이번 영상은 아이디어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고 보니 도시는 전혀 만만한 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내가 안 가본 곳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고 내 작은 발걸음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거대한 규모가 바로 도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창신동 곳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좁은 골목과 낡은 집들이 예쁘다며 사진을 찍어가는 사람들과 내가 다른 점은 뭘까. 나의 얘기를 할 것인가,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옳은 걸까.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을 마주쳤다. 이 질문들을 피해 카메라 뒤에 숨지 않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여태까지 내가 기록영상을 찍었을 때처럼 멀찍이 서서 관찰하고 아무런 편집도 하지 않고 테이프를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찰 한 것을 나만의 시선과 경험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영상을 통해 나를 보여준다는 것인데, 나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가? 줄에 발이 묶여 끌려가는 사람, 벌레가 무서워 이불 속에 숨는 사람, 자기 팔을 잘라 기계로 대체하는 사람, 빌딩들이 무너져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 999 city 작업에서 나는 네 명의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끌려가고, 숨고,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모두 내가 지양하는 것들이지만 돌이켜 보면 나 역시 종종 내 주변의 상황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불 속에 숨어도 벌레는 계속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내 주변의 일들을 보지 않길 선택하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인 희망이었던 것이다. 999 city를 완성하는 의미는, 더 이상 방안에서, 또 카메라 뒤에 숨어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내 주변과, 나 자신을 의식하며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현실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불편한 진실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남 일에 참견 하지 않고 살면 너도 나도 행복할 줄 알았는데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내가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누려왔던 편의는 지구 저쪽 편 어딘 가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거대한 도시,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지구상에서 나는 내 존재감의 위기를 느꼈던 것 같다. 계속 저만치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면 나는 정말로 없어질 것 같았다. 999 city라는 작업을 하는 것, 그리고 영상이라는 매체를 소유한 것은, 비록 내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더라도, 도시에 위치해 있고 거기서 무언가 얘기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나름의 움직임이었다. 내 몸을 크게 만들어 눈에 띄게 하지 않아도 ‘내가’ 있고 그런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매체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내가 움직이고 있다면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계속 움직이고 도시와 내 주변에 관한 영상을 만드는 것은 다만 내가 살아가는 것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사는 곳은 나 혼자 독점하는 방이 아니라 훨씬 더 넓고, 많은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의 화각도 차츰 넓어졌다. 내가 카메라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을 때와 같이, 내 영상을 보게 될 관객들과의 연결 지점 즉, 공감의 지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 나는 그 카메라를 들고 움직인다.
하자에서 나는 좋아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일을 만들어가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즐거웠고 그것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나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을 만들어가고 공부할 것이다. 어딜 가도 매번 유령이 되고 싶었던 나는 카메라를 잡기 위해,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고 2년 반 동안 땅에 붙어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처음에 그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기대했던 영상은 실제로 대단한 것이었다. 카메라를 척척 다루고 키보드를 휘저으며 편집을 할 수 있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넓게 생각할 수 있는 힘, 붙잡은 카메라를 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그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지난 2년 반 동안,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만들어 가며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 어디에 자리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공부하고 축적하는지를 인식하는 ’in‘과 들고 있는 카메라를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작업언어를 통해 나를 드러내는 'out'을 함께 배웠다. 들어가는 것이 있으면 나오는 것도 있다는 말은 참 이해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과정에서는 ’in‘과 ’out‘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버리는 함정에 빠지기도 쉬웠다. 내가 어딘가에 소속 되어 있다는 인식은, 적응이라는 명분아래 나를 억지로 그곳에 맞추게 할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접한 그럴 듯한 얘기를 한 치의 부정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이 말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뱉어내는 것들은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일 수 있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떤 것을 향하여 가고 있나,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나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근거가 나뿐만이 아닌 내가 보여주려 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감이 가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해서 공감을 얻고 싶지, 결론짓는 것에 치중해서 보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영상을 만들고 싶지 않다.
이제 나에게(in)visible: 보여 지는 것 너머
1. Prologue
만화책이나 영화 같은 데 보면 항상 신비스러운 캐릭터가 나온다. 학교에서는 존재감도 없고 평범하지만 사실 다른 곳에 가서는, 혹은 자기 방안에 있을 때는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 나는 그런 캐릭터이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대단한 것이 없었다. 잘하는 것이 많고 싶었는데 모든 걸 적당히 하다보니까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내 캐릭터가 서서히 무너져갈 때쯤 아빠가 6mm 비디오카메라를 쥐어주면서 하자에 가서 영상을 배워보라고 했다. 비디오카메라와 영상 그리고 하자는 아무것도 없던 나에게 그 뭔가 대단한 것 같았다.
영국에 있을 때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다. 아마도 지나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와 평범한 2층 집에서 사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서였던 것 같다. 길을 걸어갈 때도, 학교를 돌아다닐 때도 배경에 전혀 묻히지 않고 존재감이 너무 확실한 내가 너무 싫었다. 튀지 않고 적당한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격도 너무 조용하지도 않고 떠들썩하지도 않게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평범한 척 하면서 4년을 보냈고 한국에 돌아왔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애들 사이에서 나는 그렇게 바라던 대로 전혀 튀지 않았고 존재감도 없었다. 영어시간만 아니면 그랬다. 영국에서 편입 왔다는 얘기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별명이 ‘영국’이었고 영어 선생님은 날 괴롭히는 걸 좋아했다. 매번 영어지문을 읽으라고 시켜서 3학년 때는 한국 발음을 터득해 콩글리시로 읽었다. 영국에서는 평범한 애가 되고 싶어서 영어를 배웠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에 오니까 영어 때문에 튀는 애가 되어버렸다.
2. 문을 열고 스크린 앞에 서다
길찾기 시절은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말 할게 없을 정도로 남들에게 묻혀서 지냈다. 노리단, 합창, 나를 찾아가는 여행 등 별로 관심이 안가는 프로젝트들을 최대한 눈에 안 뛰게 참여하면서 한 편으론 빨리 주니어가 되서 영상방에 들어가길 바랐다. 길찾기 과정을 마무리하는 담임들과의 평가 테이블에서 귀는 우리 엄마에게 “토토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한데 사실 토토가 저희 반인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그 만큼 걱정 안 끼치고 자기가 할 일은 알아서 다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라고 말했었다.
존재감이 없으려면 우선 남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자기 할일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줄 알아야 하고 남 일에 참견해서도 안 된다. 나는 누구에게 다가가지도 다가오게 하지도 않으면서 그 경계에서 늘 무관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니어가 되고 캐치스코프라는 영상팀에 합류했다. 허브, 유란, 뿡, 베이, 나캉, 름사, 나마, 보라, 제이미, 케이 그리고 판돌 유리를 만났다. 혼자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갑자기 동료 작업자라며 다가온 이 많은 사람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걱정 안 끼치고 할 일은 알아서 다 하던 길찾기 시절의 토토는 나이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굉장히 작게 느껴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떨리는 내 목소리가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질문을 계속 회피할 수만은 없었다. 캐치스코프의 영상작업은 내가 미지근하게 참여하면 전체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도움은 못 줄지도 모르지만 방해는 되지 말자”가 나의 신조였지만 마음 속 깊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하지만 이 마음에 대한 동기는 지금까지에 비해 사뭇 달랐다. 자존심이 아니라 다른 캐치스코프들에게 인정받고 그들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태껏 나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 내가 존재감 없이 있으면 걱정해주고, 끊임없이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라고 손짓하는 사람들이었다.
길찾기 때와는 달리 나의 칼퇴근은 점점 줄어갔고 하자의 107호 영상방은 내 방보다 흥미로운 곳이 되었다. 영상에 비범한 잠재력이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캐치스코프와 Focus On: Interview 프로젝트를 하면서 영상은 노력한 만큼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인터뷰이였던 이언희 감독을 내가 진심으로 사모해야지 관객들도 그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달 정도의 작업 기간을 거쳐 인터뷰 프로젝트는 완성되었고 11월부터 첫 개인 작업을 시작했다.
막상 개인 작업은 시작하기에 앞서 두려웠다.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대신 얘기해주고 어려운 얘기를 쉽게 설명해주는 의지할 사람들이 없어진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동일하게 하고 싶은 얘기, 의견을 모아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얘기’,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었다. 내 얘기를 주제로 삼으라고 했을 때 처음 떠오른 것은 캐치스코프를 만나면서 겪은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혼자 웅얼거리고 하고 싶은 말을 남들의 무거운 시선에 눌려 끝까지 참고 버티던 내가 조금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 더 이상 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엄격한 규칙들 속에서 답답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한 발짝 나온다는 것은 내가 내 자신으로 부터 한 발짝 자유로워지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 내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숨고 싶어 하던 나의 모습이라고 해도.
같은 얘기여도 마이크를 잡고 말로 하는 것과 영상으로 만드는 것은 달랐다. 나를 돌아보고 분석하는 과정은 훨씬 길었고 내 영상을 볼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게 전달해야 했다. ‘내가 말을 했다’에 집중하고 있었던 나에게 듣는 사람을 고려하게 된 경험은 소중했고, 날 것으로 보여주기보다 내 의도를 살릴 수 있다는 영상의 특성에 매력을 느꼈다. 영상방에서의 첫 학기는 영상이 내 표현의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앞서서 내가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캐치스코프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3. 문 앞에서 만난 사람들
이제 막 내 안에 잠겨있던 문을 열고 나왔더니 그 앞엔 허브와 유란 그리고 새로 들어온 한결이 있었다. 유리와 다른 20대들은 나에게 10대 팀장을 해보라고 제안을 했다. 학교 다니면서도 한 번도 반장, 부반장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선거 같은 건 관심도 없었고,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 제안은 문을 열고 나왔다는 성취감에 빠져있던 나에게 문하나 연 걸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로 다가왔다. 허브와 유란과 내가 처음 영상방에 들어왔을 때 각각 너무 다르고 친하지도 않아서 유리는 걱정되는 마음에 일부로 우리 셋을 묶어놓는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허토란’에서, 그리고 107호에서 나는 어떤 존재이고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길찾기때 자기가 맡은 일은 잘해오던 나는 더 이상 나 혼자만 잘하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됐다. 같이 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내가 만약 좀 일찍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팀장이었을 때 내가 가장 자주 했던 건 과제 공지였을 거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독촉하려면 내가 이 말을 할 수 있게 과제를 먼저 끝내야 했다. 늦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선 내가 늦지 말아야 했다. 1학기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성실히 했다면 2학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자고 말하기 위해서 성실했다. 팀장은 전체를 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전체를 보려면 절대 자기 자신만의 문제에 빠져있으면 안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 나를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했다.
어떤 곳에 처음 와서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했는데, 내 경우를 되짚어 보면 캐치스코프에서 함께 영상을 만들면서 내 의견이 반영되는 것을 보았고, 나에게 기대를 걸어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었다. 사실 정확히 따져 보려면 처음 만나서 그 우물쭈물 거리던 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말 잘 못해도 “괜찮다”, “기다려 줄께”라고 말했던 사람들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첫 학기에 캐치스코프들이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주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팀장이었는데 그때서야 나도 팀의 일원이란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너와 내가 경쟁상대가 아니라 서로가 힘들 때 의지가 되어 주고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작업동료라는 것을. 팀, 코멘트 그룹, 동료 작업자 등의 이름 아래서 ‘간섭’과 ‘방해’같은 것은 더 이상 기분 나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내가 이런 것을 주도 하는 사람인 팀장이 되어갔다.
4. 배움과 실천을 동시에
나는 또 다시 새로운 학기를 맞이했고 3학기가 되었다. 내가 2학기였을 때 생긴 ‘길드하자’라는 모임은 주니어 3학기 이상의 죽돌들이 하자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체가 되면서 다른 죽돌들도 함께 이끌어 가고 싶은 마음이 모인 그룹이었다. 전 학기 때 길드 모임을 시작했던 뿡의 행적을 따라다니며 관찰하고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은 나는 당연히 참여하고 싶었다. 사실 새로 만든다는 게 더 정확했다. 뿡, 나르샤, 엽, 가람, 오드리 등 길드를 이끌어가던 죽돌들이 3학기를 마지막으로 수료를 해버렸고 자연스레, 3학기인 나는 말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주도적인 사람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107호 안에선 1년 동안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말해도, 많이 말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107호 밖으로 나가서 허브, 유란, 한결이 아닌 다른 50명의 죽돌들 사이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되는 건 쉽지 않았다. 원래 대인원에 대한 공포증도 있었고 “쟤 왜 나대” 라는 말은 더욱이 듣기 싫었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프리스쿨 때 우리는 무성영화를 만드는 미션을 받았다. 각본, 세트, 음악, 폴리, 촬영, 편집 등 모든 것을 우리 손에서 해결해야 했고, 시간은 3일 밖에 없었다. 지체할 시간 없이 빨리 시나리오를 써야 했는데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말 할까 말까 갈등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조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화장실 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3일 동안 영화 한 편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찍어야 하는데 진척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하루에도 수십 번 뿡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3학기가 뭐 길래. “3학기니까…….” 어쩌고 하는 말들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마음 같아선 나도 내빼고 누군가 앞에 나와 주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지난한 침묵 속에서 나는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3학기이니까”라는 말은 모두가 3학기가 되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요구사항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있고 보이는 것을 못 본 척하지 말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날 3학기들을 불러서 얘기를 했다.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상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우리가 먼저 앞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라고. 나 혼자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죽돌들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PD 역할을 맡았던 속눈썹, 음악과 폴리를 담당해준 공연팀의 왕양, 포디, 진, 환, 마니. 미술팀을 이끌어갔던 유메, 제이, 그림자. 편집의 유란, 조연출 허브, 촬영 한결.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 위치에서 다른 죽돌들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드디어 우린 영화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3학기가 되자 드디어 그 동안 내가 경험하고 받아들인 것들을 밖으로 내보여야 하는 시기가 왔다. 언제까지 좋은 것만 보고, 말하지 않으면서 듣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뿡이 떠난 시점이 바로 내가 밖으로 나올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없고, 때문에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할 수 없다. 내가 보이는 것만큼 행동하고, 차차 내게 닥쳐오는 것들을 부딪혀보면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배우고 있어요.“ 내지는 ‘아직’이란 단어를 붙여 말하는 모든 것들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배우는 시기, 행동하는 시기가 나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의견을 말하고, 주도하는 등의 역할을 해야 되는 때가 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시간을 유예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리스쿨을 계기로, 내가 유예하는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항상 불안할 것이라고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 할 거면서 한쪽으로 계속 조마조마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일단 부딪혀 보기로 결심했다.
프리스쿨의 경험을 빌어 3학기를 중심으로 길드가 구성되었다. 주니어 과정인 열린작업장의 변화와 함께 전체가 하나로 움직이는 프로젝트들이 많아졌고 나도 107호 밖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갔다. 107호 밖은 내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보니 내가 속해 있는 더 큰 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열린작업장이라는 팀에서는 팀원도 많았지만 팀을 이끌어가고 싶은 팀장들도 많았다. 괜히 처음 보는 대인원에 대해 겁을 먹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길드를 하면서 확실히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 나와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찾았고, 내가 나를 믿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줄 수 있게 된 것 같다.
5. 숨기고 싶은 것을 인정하기
영상을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내가 분명히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을 가지기 까지는 카메라를 다루는 법에서 부터 매 학기 한 편의 영상물을 만드는 것까지,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노력하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영어는 내가 선택해서 잘하게 된 것이 아니다. 우연히 어렸을 때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었고 특별히 영어가 좋아서, 언어가 좋아서가 아니라 적응해야 됐기 때문에 배울 수밖에 없었다.
일반학교를 다닐 때 영어를 잘한다는 것에서 받은 주목은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일단 사람들은 내가 유학을 갔다 왔다는 사실을 우리 집이 돈이 많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차라리 사실이었으면 했다. 둘째, 영어를 잘하면 똑똑하다? 모범생이다? 차라리 이것도 사실이었으면. 나는 학교에서 잠만 자고, 시험을 잘 보는 것도 영어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다른 애들은 나 때문에 영어 등수가 떨어진다며 불평했다. 자연히 중학교 3년 동안 이런 편견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는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하자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쫓아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한 번 영어밖에 못하는 애가 되긴 싫었다. 이런 나에게 글로비시에 대한 제안은 굉장히 고민되는 것이었다. 다른 죽돌들에게 영어 수업을 하라니…….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것, 하고 싶은 영상만 고집하고 다른 건 일체 안하겠다는 것도 이기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은 없었지만 영어에 도전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글로비시와 영어의 차이점, 글로벌 잉글리시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1년이 걸렸다. 하지만 계속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던 ‘영어’와 차별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불어나 일본어를 배울 때처럼, 글로비시를 새로운 언어라고 생각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나도 배우는 입장이 될 수 있었다.
하자에서 배우는 입장은 심리적으로 가르치는 입장보다 훨씬 쉽다. 내가 간절히 배우고 싶은 것만 있으면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책으로 공부할 수도 있고, 같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모임’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항상 ‘배우는 중’이기 때문에 누구도 나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얻어가는 것도 자연히 늘어난다. 하지만 반대로 가르치는 입장이 되는 것은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그것을 남들과 공유하길 선택했을 때는, 남의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도 해야 하며 다른 죽돌들이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 등을 고민하는 수업준비도 해야 한다.
글로비시 프로젝트는 이런 점에서 다르다. 예전엔 나 혼자 영어를 너무 쉽게 배운 것 같아서 또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괜히 칭찬을 받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글로 비시에서 나는 사실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고, 수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2년이 지난 지금, 글로비시 프로젝트에 도전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하자 투어를 영어로 해야 될 때 전날 잠을 설치지도 않으며, 즉흥적인 상황에서 통역하는 것도 마냥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내가 어딘가에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성취감을 준다. 성취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는 항상 묻어두고 싶은 장기였지만 글로비시를 하면서, 말하고, 쓰고, 읽는 것 뿐 만아니라 통역, 수업과 같은 다른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주목, 선택하지 않은 능력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지금도 수료에세이를 쓰는 동시에 다음 학기 글로비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무언가에 대한 공부가 끝없는 것처럼 공부의 교제를 만드는 글로비시 프로젝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끝이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 학기 더, 시니어로서 리사와 함께 글로비시 프로젝트를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6. 안과 밖의 경계 위에서
주니어 3학기 때 하자 마당에 컨테이너가 들어왔고 우리는 ‘컨테이너 어페어‘라는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작업하시거나 연구하시는 분들을 초대해서 특강을 듣거나 함께 토론을 하면서 도시에 관한 우리의 사유를 넓히고나 한 프로젝트였다. 가장 기대하기도 했었고, 인상 깊었던 강의는 [상계동 올림픽]을 만드신 다큐멘터리스트 김동원 감독님의 강의였다. 그때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닌 이야기를 다룰 때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어떻게 관점을 만들어나가나요?” 당시 우리에게도 한 가지 공통의 주제가 있었다. ‘Save My City’, 예전부터 도시에 대해 관심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이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선 자신만의 동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야했다. 김동원 감독님은 내 질문을 꿰뚫어 보셨던 것 같다. 굉장히 심플하게, “여러분이 어떤 것에 대한 영상을 찍던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지금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세요.”라고 하셨다.
Save my city는 주니어 과정의 모든 죽돌이 네 팀으로 나뉘어 서울이라는 도시와 그 근교의 신도시까지를 탐험하면서 현재 도시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과 이야기 거리를 작업화 해 보는 프로젝트였다. 도시는 내 짧은 인생의 대부분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지만 정작 이렇게 오래 관찰하며 걸어본 적은 없었다. 우리는 마치 서울에 처음 상경한 사람처럼 무리지어 다니며 눈에 띄는 것들은 모두 카메라에 저장했고 몸이 이끌리는 곳을 따라 무작정 걸어 다녔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처음 발견한 사람‘, 하지만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팀이 만든 [Wavy City]라는 영상물 속의 물고기가 도시 생활에 적응해버려서 깨끗한 물을 찾아도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당장 시골에 내려가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물고기는 우리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였다. 재개발이 되는 도시 한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것을 선동하는 사람도 아닌, 직접적인 피해자도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물고기라는 캐릭터를 통해, 뿌리 내릴 수 있는 곳에 대한 작은 소망과 미미한 영향이지만 우리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만약 ‘Wavy City’를 혼자 만들었으면 그렇게 부지런히 밖을 걸어 다니지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혼자 방안에 앉아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며 나의 정체성은 도대체 뭘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팀으로서 공통의 경험을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만들고 ‘모아야’ 했기 때문에 움직이면서 생각하길 택한 것이다. 도시, 또는 ‘밖’은 항상 있지만 내가 들여다보길 선택하지 않으면 항상 ‘안’과 ‘밖’으로 분리될 것이고 비록 도시에 살고 있지만 나는 유령 같은 존재일 것이다. 카메라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도구에서 밖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그렇게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을 때, 때론 한 발짝 떨어져 봐야 하고 때론 내가 카메라에 나올 정도로 가까이 갈 수 있어야 한다. rec을 눌렀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되는 것처럼 rec을 누르고 어딜 향해 비출 것인지 매 순간 스스로 판단 할 수 있는 자기 확신이 필요한 것 같다. 김동원 감독님이 12년 동안 비전향장기수 할아버지들과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완성한 [송환]처럼 나에게도 내 카메라를 들고 오랫동안 몰두 하고 싶은 주제가 있는지 고민하게 됐다. 12년을 정확히 약속할 수는 없지만 ‘도시’라는 주제를 계속 탐구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특징들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 말이다.
7. 세상을 넓혀준 카메라
주니어 4학기, Save My City 때의 작업을 이어가야겠다는 다짐으로 그림자와 함께 '999 City'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림자와 나는 이유는 달랐지만 각각 999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모티브 삼아 움직였다. 나에게 999는 119와 같은 숫자였다(영국에서는 119가 999이다) 따라서 ‘999 City’는 위기의 도시라는 의미였다. ‘기후변화시대를 직면한 창의적인 십대들’, ‘창의성 위기의 삶을 만나다’ 등, 특히 ‘위기’와 ‘시대’라는 단어를 많이 접한 학기였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위기라고 동의하던 동의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위기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위기를 마주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게 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한 곳을 정해 필드워크를 나갔다. 그림자는 공책과 펜을 들고, 나는 카메라로 기록을 했다. Save My City 때처럼 아이디어가 샘솟길 기대했던 걸까, 더 깊이 고민한다는 게 두려웠다고 해야 될까, 순식간에 몇 주가 흘러가고 창신동, 공덕동, 여의도, 문래동, 한강, 여러 곳을 다녔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내심 알고 있었듯이 이번 영상은 아이디어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고 보니 도시는 전혀 만만한 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내가 안 가본 곳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고 내 작은 발걸음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거대한 규모가 바로 도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창신동 곳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좁은 골목과 낡은 집들이 예쁘다며 사진을 찍어가는 사람들과 내가 다른 점은 뭘까. 나의 얘기를 할 것인가,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옳은 걸까.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을 마주쳤다. 이 질문들을 피해 카메라 뒤에 숨지 않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여태까지 내가 기록영상을 찍었을 때처럼 멀찍이 서서 관찰하고 아무런 편집도 하지 않고 테이프를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찰 한 것을 나만의 시선과 경험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영상을 통해 나를 보여준다는 것인데, 나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가? 줄에 발이 묶여 끌려가는 사람, 벌레가 무서워 이불 속에 숨는 사람, 자기 팔을 잘라 기계로 대체하는 사람, 빌딩들이 무너져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 999 city 작업에서 나는 네 명의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끌려가고, 숨고,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모두 내가 지양하는 것들이지만 돌이켜 보면 나 역시 종종 내 주변의 상황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불 속에 숨어도 벌레는 계속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내 주변의 일들을 보지 않길 선택하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인 희망이었던 것이다. 999 city를 완성하는 의미는, 더 이상 방안에서, 또 카메라 뒤에 숨어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내 주변과, 나 자신을 의식하며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현실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불편한 진실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남 일에 참견 하지 않고 살면 너도 나도 행복할 줄 알았는데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내가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누려왔던 편의는 지구 저쪽 편 어딘 가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거대한 도시,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지구상에서 나는 내 존재감의 위기를 느꼈던 것 같다. 계속 저만치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면 나는 정말로 없어질 것 같았다. 999 city라는 작업을 하는 것, 그리고 영상이라는 매체를 소유한 것은, 비록 내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더라도, 도시에 위치해 있고 거기서 무언가 얘기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나름의 움직임이었다. 내 몸을 크게 만들어 눈에 띄게 하지 않아도 ‘내가’ 있고 그런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매체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내가 움직이고 있다면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계속 움직이고 도시와 내 주변에 관한 영상을 만드는 것은 다만 내가 살아가는 것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사는 곳은 나 혼자 독점하는 방이 아니라 훨씬 더 넓고, 많은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의 화각도 차츰 넓어졌다. 내가 카메라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을 때와 같이, 내 영상을 보게 될 관객들과의 연결 지점 즉, 공감의 지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 나는 그 카메라를 들고 움직인다.
하자에서 나는 좋아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일을 만들어가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즐거웠고 그것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나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을 만들어가고 공부할 것이다. 어딜 가도 매번 유령이 되고 싶었던 나는 카메라를 잡기 위해,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고 2년 반 동안 땅에 붙어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처음에 그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기대했던 영상은 실제로 대단한 것이었다. 카메라를 척척 다루고 키보드를 휘저으며 편집을 할 수 있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넓게 생각할 수 있는 힘, 붙잡은 카메라를 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그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지난 2년 반 동안,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만들어 가며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 어디에 자리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공부하고 축적하는지를 인식하는 ’in‘과 들고 있는 카메라를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작업언어를 통해 나를 드러내는 'out'을 함께 배웠다. 들어가는 것이 있으면 나오는 것도 있다는 말은 참 이해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과정에서는 ’in‘과 ’out‘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버리는 함정에 빠지기도 쉬웠다. 내가 어딘가에 소속 되어 있다는 인식은, 적응이라는 명분아래 나를 억지로 그곳에 맞추게 할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접한 그럴 듯한 얘기를 한 치의 부정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이 말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뱉어내는 것들은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일 수 있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떤 것을 향하여 가고 있나,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나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근거가 나뿐만이 아닌 내가 보여주려 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감이 가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해서 공감을 얻고 싶지, 결론짓는 것에 치중해서 보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영상을 만들고 싶지 않다.
이제 나에게 영상은, 설령 내가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매체이다. 내가 알고 있는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보여 지는 것 너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매체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보는 것 너머로, 내 주변과 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집중과 관심을 나에게로 향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보고 해석한 것을 영상으로 만들어 내어 그것을 타인들과 나누고 싶다. 나는 카메라를 매체로 가진 사람이지, 그저 카메라 앞에만 서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주니어 과정의 수료를 기점으로 이제 나는 내가 2년 반 동안 몸담았던 곳에서 자립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을 떠났다고 해서 계속 어떤 곳에 대한 소속을 갈구하고 싶진 않다. 내가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어디에 소속되건 소속되지 않건 간에 나로 부터 출발하는 공부를 지속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상은, 설령 내가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매체이다. 내가 알고 있는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보여 지는 것 너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매체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보는 것 너머로, 내 주변과 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집중과 관심을 나에게로 향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보고 해석한 것을 영상으로 만들어 내어 그것을 타인들과 나누고 싶다. 나는 카메라를 매체로 가진 사람이지, 그저 카메라 앞에만 서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주니어 과정의 수료를 기점으로 이제 나는 내가 2년 반 동안 몸담았던 곳에서 자립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을 떠났다고 해서 계속 어떤 곳에 대한 소속을 갈구하고 싶진 않다. 내가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어디에 소속되건 소속되지 않건 간에 나로 부터 출발하는 공부를 지속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불을 더 밝혀야 할 시간
<불을 더 밝혀야 할 시간>
0-1. 삼단 밝기조절 스탠드
얼마 전, 스탠드 전구를 새로 갈았다. 내 스탠드는 삼단으로 밝기조절이 가능한데 그 전에 쓰던 전구는 고작 한 단계의 밝기밖에 설정할 수 없었다. 새로운 전구는 그 전 보다 컸고 무엇보다 삼단 조절이 가능해서, 나는 좀 더 기분 좋게 잠들 수 있는 구실이 생겼다. 잠들기 전 누르는 스탠드 버튼은 습관적이면서도 필수인데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하니 기억조차 흐물흐물 할 정도다.
비단 잠을 잘 때 뿐만인가 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어서, 어두컴컴할 때에 하는 행동들 대부분 스탠드를 켠다. 형광등의 하얗고 조금은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퍼지거나 밝음과는 다른 이것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권태기조차 오지 않는가보다. 언제부턴가 하자에서 지낸 하루의 고단함을 마무리하러 침대에 누우면 항상 책상에 놓인 스탠드가 잠드는 그 순간을 함께 했다. 하자에 몸담았던 2.5년은 때론 밝고 아름다웠지만 때론 눈만 깜빡거리다 산산이 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켜지기도 하고 조금은 흐려지기도 했던 지난날의 전구는 마치, 그 상황들이 아닌 거기 있던 나의 비유 같다.
불은 내가 켠다. 끄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밝기도 맘대로 조절한다. 때론 같이 불을 밝히기도 했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밝아지기도 했으며 이제 전구를 새로 갈아 끼울 시기가 됐다. 2.5년이나 밝힌 것이 아니라 2.5년밖에 밝히지 않은 거다. 단정 짓기엔 아직 갈아 끼울 전구가 많이 남았다. 그 중 첫 전구와 함께 했던 2.5를 여기에 적는다.
1-1. 장식만이 화려했을 뿐
처음 불을 켰던 때가 언제인가 하니, 역시 일단 시작으로 첫 머리를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자에 들어왔다. 내가 제일 작았다. 예상은 했지만 어쩐지 거기서부터 조금 주눅 들었다. 하자의 첫 인상은 무서웠다. 항상 새로운 무언가는 그랬지만 유달리 그때가 그랬던 것은 입시를 때려 치고 나온 것에 대한 부담감이었다.
원래 처음 내가 짜놓은 계획대로라면, 나는 하자 입학식이 아닌 예고 입학식에 있어야 했다. 힘들게 서울과 일산을 오고가는 입시생이었던 시절은 불과 2년 만에 회의감과 의문으로 끝났다. 입시가 나를 작은 틀 안에 맞추고 가둬놓는 것만 같아 괴로웠다. 나중엔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문제까지 파고들었다. 너 미술 하고 싶니? 스스로 물었지만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쳤다. 좀 더 다른 걸 찾아보고 싶었다. 내가 잘,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것. 그렇게 열일곱의 나는 3월의 봄, ‘왜 있잖아, 조그만 애’ 라고 말하면 누구나 기억할 만한 제이로 하자작업장학교에서 길찾기로서의 첫 도장을 찍었다.
아침에 요가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빠져도 괜찮다는 인식이 슬그머니 자리 잡았다. 빠져도 별 말씀 안하시는 프로젝트 판돌을 보며 안심하고 아침잠을 잤다. 잠 때문에 작업장 프로젝트에서 드로잉파트를 아예 통째로 빼먹기도 했고 영상작업으로 오프닝 타이틀을 배울 때도 수업 중간에 들어갔다. 후에 유리에게 인사를 해도 잘 안 받아 주셔서 내가 수업 내내 지각해서 밉상으로 찍혔구나 하며 절망도 했다. 그땐 한창 습관이 몸에 배어서 거의 새벽 3-4시까지 안 잤다. 그러니 10시 등교조차 힘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오죽하면 판돌들과 ‘세 시전엔 꼭 자기’라는 약속을 했으려나 싶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대한 의지가 더 약했기에 그 누구의 말도 깊게 들어오진 못했다.
이런 습관은 주니어 1학기 내내 지속됐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학교중심방엔 엄청 편한 소파가 있었는데 거기 앉기만 하면 졸음이 솔솔 오곤 해서 지겹다 싶을 정도로 잤다. 별 필요 없는 것만 지속성을 가지는 것 같아서 후에는 좀 짜증이 났다. 잠보다 더 커다란 벽이 있었다. 작심삼일을 꾸준히만 한다면 그것은 작심삼일이 아닐 수 있다지만 어디 그것이 쉬이 되는 마음가짐이냔 말이다. 이런 나약하기 그지없는 내 마음은 변명으로 점철되어 초심을 부정하게 했다. 찾자가 아닌 지금 당장의 흥미에 포커스를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성실을 상실한 죽돌 생활은 그 벽으로 인해 더욱 어렵지 않았다. 정말 하고픈 것을 찾고 싶다고 온 애가 정작 흥미 없다고 프로젝트는 내팽개치고, 잠만 자고 결석을 일삼는 생활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건, 그 어떠한 말로도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다만 그때 유일하게 가장 신경 쓰고 민감했던 부분이 “관계”였다. 사람이든 작업이든 또 다른 특정 무언가든 모두 조금씩은 다른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걸 길찾기가 되고 처음 알았다. 허나 관계라느니 소통이라느니 하는 건 되게 미숙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거기에 대한 집착이 생긴 것 같다. 뒤쳐지기 싫은 성향이 강해서 더 그랬다. 누구에게나 매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장난도 다 받아주고 맞춰주고 웃어줬다. 하지만 왜인지, 점점 지쳐가는 마음이 생기자 그 모든 게 귀찮아지면서 슬펐다. 워낙 좋고 싫음이 분명한 성격이라 더 그랬다. 하지만 그만 두거나 팽개치진 않았다. 그게 그때의 나로서는 가장 시간과 관심을 쏟았던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것조차 없으면 여기서 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태로 걸바를 갔다. 유난히 따듯한 날씨의 4월은 힘을 내기에 충분했다. 그 기운을 받아 쫄래쫄래 걸었다. 힘들었지만 너무너무 즐거워서 그쯤이야 했다. 그 따듯함 안에서 차가움이 일어났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시발점이 된 그 사건은, 한 죽돌을 놓고 여러 죽돌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분위기를 조장했던 일이었다. 피해의식에 절고 관계에 지친 내 정신머리는 특정 상대를 향한 미움으로 나타났다. 속에만 담아두고 있던 말을 밖으로 뱉고 나니 요상하게도 미움은 더 커지고 색안경은 도수도 높아졌다.
그러나 사실 같잖은 이유로 쉽게 싫어하고 쉽게 풀리던 단순함이 있어서 그랬는지 시간이 자연스레 그 기분을 해결해줬다. 후에 사과편지를 주고 간단하게 인사하며 그 죽돌과의 관계를 별 무리 없이 이어갔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그 죽돌 얘기가 나오면 솔직히 마음이 불편하고 부끄럽다. 아주 작은 피해의식이 부풀어올라 타인을 공격할 수 있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알게 됐다. 꽃씨파티를 길찾기가 기획했던 적이 있었다. 19명이 멍석방 꽉 들어차게 옹기종기(이런 귀여운 단어를 쓰고 싶지 않지만) 모여서 긴 회의를 진행했다. 침체된 분위기에 다들 기운 빠지는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조용히 몸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난 울었다. 왜? 단지 그 분위기에 휩쓸려 힘들어서 그랬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일단 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있지 않았기에 더 힘들었다. 거기에 쏟은 관심은 몸뚱이 뿐이었다. 그런 상태가 쇼하자 기간까지 쭈욱 이어졌다.
걸바때 본 밤바다는 내게 특별함으로 남아있어서 혹시 다시 보면 뭔가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친구와 바다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본 바다는 별 특별한 것도 없었다. 9박 10일간의 여정과 마주친 밤바다와 버스타고 몇 시간 만에 달려간 바다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가서 하자를 그만 두겠단 생각은 던져버리고 오긴 했으나 다녀온 후에도 여전히 아직 그 상황과 내가 아주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해야 할 일로 힘든 것은 좋지만 어떻게 하면 잘 할까 머리를 굴렸다기보단 그냥 힘들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멈춰있었다. 그러니 하기 싫을 수밖에. 자서전을 쓰고 뮤지컬을 만들고 몸벌레를 했는데 남들 앞에서 부끄럼을 많이 타는 나에겐 이 모든 게 별로였다. 결국 어영부영 엉망이던 길찾기를 끝냈다.
그렇게 길찾기 내내 관계 어렵다고, 작업하기 싫다고 떼쓰고, 땡깡부리고 투정부렸더랬다.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다고 울어제꼈더랬다. 허나 내 마음은 전형적 갈대라서, 쇼하자가 끝나자 다음 학기도 하기로 맘먹었다. 사실 나간다 한들 무엇을 해야 되는지 몰랐기도 했고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한참 못해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어느 매체에서 학습을 해야 하나. 또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그중 디자인은 정말 가기 싫었다. 그리기 싫었고 찔렸으니까. 처음부터 포장됐던, 입시를 때려 친 이유는 진심을 숨겨둔 상자였다. 물론 어느 정도 사실이 가미 된, 도주였다. 겉멋 든 사람이 싫었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었단 걸 느끼고 찔린 순간부터 그림 그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리지 않는 게 유일하게 내 죄책감을 덜 수 있는 거였다. 그럴수록 더 부딪히라는 코멘트를 받았더랬다. 먼저 떠오른 건 부모님이었다. 내 길찾기 생활을 묵묵히 지켜보던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군소리 없이 잘 하고 있던 입시를 때려 치고, 제 갈길 가고 싶다며 간 딸내미인데. 이건 아니거니 싶었다. 만회하겠단 마음으로 디자인을 택했고 그렇게 후회로 가득한 채, 여름은 왔다.
1-2. 스위치를 켜야 하는 순간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을 비비던 겨울, 전시를 했다. 틴에이지 회/로망이란 타이틀의 전시회에 참여하여 한켠에 우리가 만든 동화책이 전시됐다. 제목은 <물에 빠진 물고기>. 어느 물고기공주가 마법의 약을 먹고 인간이 되어 왕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슬픈 이야기가 담긴, 크레용 물고기의 첫 작업물이었다. 크레용 물고기는 이제 갓 길찾기에서 주니어 1학기로 올라온 센, 유메, 새삼, 제이가 동화책을 만들어보자며 결성한 팀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 만났다기 보단 그냥 하고 싶어서 만났다. 그전까지 서로 그렇게 친하진 않았는데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며 거의 항상 같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똘똘 뭉친 크레용이 됐다.
서로 개성도 성격도 다른 넷이 모여 깔깔댐으로 카페 그래서와 중심방을 채웠다. 잠시의 트러블도 있었지만 그리 크게 맘 담아 두진 않았다. 막판에 몇날밤을 새워 완성된 우리의 동화책은 인천 스페이스빔에서 전시됐다. 바쁘고 고단했지만 9시간에 걸쳐 쌓인 응어리를 푼 뒤라 마지막까지 서로 힘내자 하며 쇼하자와 전시를 준비했고 12월 추위 속에서 우리 내부의 따스함으로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난 이 작업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한 번도 전시장에 개인적으로 가본 적 없고 후에 동화책의 행방도 제대로 알지 못한 이 무관심이란! 이때까지도 내겐 이들과의 ‘관계’가 중점으로 자리 잡았다. 작업은 그들과 함께 더 즐겁기 위한, 그리고 무엇이라도 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한 일종의 매개체였다.
때문에 그냥 작업을 한 사실이 중요할 뿐, 작업물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그 작업에 대한 이렇다 할만한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 왜? 라고 물었다. 무슨 작업을 하든지 이유가 필요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워서 버벅거리며 대꾸도 못했다. ‘모르겠어요, 그냥’으로 마무리하는 태도는 먹히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설명해야했다. 또 다시 내 짜증이 발동했다. 그땐 몰랐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걸. 무엇을 하든 이유는 있었다. 단지 내가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흥미 있는 것조차 조금만 상황이 힘들어지면 쉬이 잊고 관심 밖의 것으로 치부해 버리곤 했다. 작업은 안중에도 없고 내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계속 다른 곳에서 낭비되는 탓에 내가 가진 가능성과 능력들이 수면으로 드러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2학기가 되고 디자인팀 tot에게 영상팀 캐치스코프와 열린작업장 P.V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고 함께 작업하게 됐다. 연애도 시작했다. 익숙치 못한 관계들에 좋기도 했지만 당황스러웠다. 학기에 접어들수록 맘은 혼자 히키코모리처럼 돼갔다. 연애에서 받는 좋지 않은 파장이 작업에까지 이어졌다. 나만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애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얼마만큼 힘든지 알아주길 바랐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엔 짜증으로 받아쳤고 남 탓하기 일쑤였다. 오지게 싸우고 결국 마지막엔 항상 울었다. 부끄럽지도 않았나 싶을 만큼. 여기에 소비되는 내 정신적, 감정적 무게가 너무 크다보니 얼굴은 늘 종이 구기듯 구긴 죽상에 회의 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지난 번 꽃씨파티 때처럼 그 분위기에만 힘들었다. 주변은 안중에 없고 눈앞에 씌인 안대를 벗을 생각에 까지 미치지 못하는 나를 고민하게 됐지만, 곧 자기합리화로 무마한 채 넘겼다. (후에 세이랜은 소녀들은 너무 자기연민에 빠져있다고 한탄하셨다. 마침 이것이 작업에 개입됐을 때 나는 그 안에 있었지만 없었던 거란 걸 생각하던 시기여서 엄청 찔렸던 적이 있다.) 아무튼 얼굴로 그렇게 시위하고 다니는 생활을 4월에 접고, 편도수술을 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는데 정말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병원침대에 뉘여 실려갔다. 수술실은 영화에서 보던 풍경과 다를 것 없었고 눈 한번 감고 뜨니 그것은 끝나있었다. 처음 해보는 수술은 한 달 만에 몸무게를 5kg이나 앗아갈 만큼 악독했다. 덕분에 살빠졌다고 좋아했던 적도 있지만 나중엔 한 달 내내 죽과 아이스크림으로 식사를 대신한 것 보다야 차라리 살 안 빠지는 게 나을 정도란 생각도 들었다. (된장국에 계란말이를 처음 먹던 날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몸의 아픔보다 참기 힘들었던 건 그저 병실 안에서 갑갑하게 시간을 지내야 한다는 거였다. 빨리 다시 학교로 달려가서 동료들을 만나고 싶고 작업 하고 싶었다. 수술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게 만들어줬고, 무엇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날들이 괴로웠던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작업에 대한 의욕도 재충전시켜주는 발판이 되었다. 2학기 마무리 에세이에 이런 문장이 있다. ‘수술 후 학교를 처음 갔던 날, 하자의 붉은 벽돌이 반갑게 느껴진 적은 1년 동안 하자에서 등하교를 한 이래 처음이었다.’ 진짜다. 수술로 탄력 받아 돌아와서 P.V에 등장하는 짱병캐릭터를 맡아 그렸다. 일일이 손으로 움직임을 한 장 한 장 그려야 했기에 주말까지 반납했다. 싫었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안그래도 크게 뒤집히고 흔들리던 작업이라 그런지 다들 아쉬움도 많았는데, 난 관심을 엉뚱한 곳에 너무 많이 쏟아버려 뒤늦게 같이 일한 사람들에게 엄청 미안했다. 그만큼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부분으로라도 채우고 싶었다. 그리고 줄곧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끙끙대며 있던 것보다야 내가 할 일이 있고 그것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해! 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다른 곳에 쏟았던 관심과 수고를 여기에 쏟으며, 내키지 않고 힘든 것도 애정 어린 눈으로 보고 만지면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언제 이런 말을 들었다.(꽤 자주 들었던 것 같다) 관심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거라고.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역시 백번 듣는 것보다야 몸소 느끼는 게 훨씬 낫다.
여기서 제일 크게 배운 것 중 하나는 본인의 동기부여, 자기주도적 학습이 중요하단 건데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사실 아직까지도 내 입맛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을 알기에 달라진 나일 수 있다. 이제 와서 안타까운 사실은, 알지 못했던 그때에 외면한 것들을 좋아할 기회조차 놓친 것만 같다. 당장 눈을 감고 귀를 막기엔 너무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았을 텐데.
2-1. 색은 다르되, 밝기는 더 밝게
지난 학기 내내 구긴 폐휴지 닮은 얼굴 모양새였다고는 하나, 내 얼굴이 사실 그리 구김만 많은 것은 아니었다. 조울증처럼 미친 듯이 웃고 다니는 시기도 있듯, 지칠 대로 지쳐 말아먹은 시간 때문인지 마음이 좀 편했다. 비온 뒤 땅이 굳는다고 하지 않던가. 마음이 편해지기까지 온갖 설레발은 다 치며 작업을 여럿 망치기도 했지만 그렇게 서서히 맘 잡고 다시 불 켤 에너지를 충전했다. 디자인이 아닌 영상매체를 직접 다뤄볼 수 있게 된 건 주말영상학교를 시작하면서였다.
p.v작업을 할 때 내 손으로 그린 캐릭터들이 프레임 안에서 움직임을 갖고 이야기를 밀고나가는 모습이 신기했고 더 해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정말 의욕으로 가득한 프로젝트였다. 영화를 보기도 하고 직접 찍어보기도 했다. 신기하게만 보이던 카메라를 직접 들고 찍는다니!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감출 수 없었고 평생 찍게 될 줄 몰랐던 영화도 찍었다. 시나리오를 쓰느라 밤도 여러날 샜다. 즐거워서 어쩔 줄 몰랐다.
하자에서 이렇게 관심을 쏟았던 때도 있었나 싶을 만큼. 그만큼 깨지기도 많이 깨졌지만 같이 밤을 새고 같이 촬영 하고 같이 편집하고, 혼자만 아니라 다 같이 만들어내는 작업이었기에 괜찮았다. 반면 몸은 지치고 고단했다. 밤새는 일이 빈번했고(어느 날은 이틀 밤새워 시나리오 쓰고 하자 가려고 지하철 탄 후, 문 쪽에 서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깜빡 놨더니 지하철 봉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그게 계속 반복 되서 부끄러운 나머지 나중엔 아예 벽에 기대 서서 잤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샜나 모르겠다.) 촬영도 서로 스태프를 뛰어주다 보니 일정이 빡빡했다. 하지만 그보다 큰 설렘에 그것쯤 아무 것도 아냐 했다.
공동작업에 대한 더 큰 기대와 욕구를 심어주기에도 충분했다. 크레용 물고기때 관계를 이어나가고 결과물을 위해 작업을 하긴 해야겠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이었다. 그런데 그때와 달리 너무나 의욕이 충만해서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고 믿었던 이번에도 같은 어려움이 닥쳤다. 뭐라도 막 찍고 싶은데 뭘 찍어야 할지,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 고민보단 당장 코앞에 놓인 촬영이 앞섰기에 신경 쓸 겨를 없이 빨리빨리 진행시켰다. 평소 취향인 판타지로맨스(?)적 단편영화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내 첫 단편영화의 탄생이었다.
3학기는 내 기억에 가장 설렘 가득했던 학기였다. 편협함을 벗어나 다양한 작업자들과 작업을 만나 배우고 움직이며 빨빨 돌아다녔다. 열심히 켠 불을 지속성 있게 가져갔더니 생긴 이득은 꽤나 짭짤했다. 쓸데없고 과한 관심은 어느 정도 적당선이 유지될 수 있게 됐고 그것은 더 이상 엉뚱한 곳이 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어딘가에 간절함을 쏟고 있는 내 상태가 ‘너무 좋아!’ 라며 이를 앙 다물 수 있기가 어디 쉬운 일이었나. 거기에 더해진 ‘같이’ 시너지 효과는 환타지아를 외쳐야 할 것 같다. 불이 꺼지지 않을 지속력을 가지게 된 것도 혼자의 힘은 아니었다. 나도 함께 했던 사람들의 불에 지속력을 넣어준 사람 중 하나가 되었나?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랬을거라 생각한다. 뭐든 한 쪽만 움직인다면 그건 일방적 그 이상이 될 수 없을 테니.
2-2. 불이 닿는 모든 것을 볼 줄 아는 것
올해 첫날, “똑똑하고 현명하고 나쁜 소녀가 되는 걸 해보자”는 문자를 받았다. 열아홉. 고3이라 불리는, 곧 스물이 될 나이를 먹었다. 떡국 두 그릇 먹었다고 난 스물이야 하는 어이없는 소리도 늘어놓으며 새해를 맞았다. 가장 맘 편한 방학이었다. 단편영화 <그를 기억하는 방식>을 찍고 들었던 신랄한 평가들을 잊을 수 없다. ‘깊이’가 없다는 중론에 수긍할 수밖에 없던 내 모습은 더 잊기 힘들었다. 나조차도 확실히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은 어느 누구도 납득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꿈보다 해몽도 어느 정도 꿈이 받쳐줘야지. 돌이켜보면 항상 얕은 수면에 잠시 발만 담그고 쑥 빼버리는 방식에 길들여져 있었다. 첨벙첨벙 놀기 위해선 단지 발만 적시는 정도로 만족하면 안됐다. 하지만 무섭고 자신 없었는지 여태까지 들어가지 않고 물장구만 대충 치던 나였다. 그래서 ‘이번만큼은!’이란 마음을 굳게 다졌다. 더구나 수료를 앞둔 수료학기를 보내는 거라 부담이 더 크기도 했다. 숨 한번 고르지 않고 열심히 학습 계획에 대해 브리핑했는데 유리가 마지막에 ‘열심히 살자’했다. 다시 한 번 속으로 ‘넵’ 했다. 공동작업의 설렘도 느꼈겠다, 마지막 학기도 지속적으로 설레는 작업으로 멋지게 끝낼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은 단 한 번도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개인 작업을 주로 잡고 가는 학기를 보냈다. ‘다시 쓰는 자서전’을 주제로 잡았다. 길찾기때 자서전 쓰기를 했었는데 그때 쓴 글이 하자에 오기 전 나의 이야기라면 이번엔 하자에 들어와서 그 시간동안의 나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의미였다. 애초에 영상작업을 하면서 기대했던 애니메이션에 미련이 남았는지 애니메이션작업을 하겠다고 했다. 일정표를 짜고 워드에 글을 써내려갔다. 허나 그 글이 뒤집어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건 자서전이 아니라던 세이랜의 말이 얼마나 매몰차게 느껴지던지. 할 말과 기운을 잃었다. 자서전은 단순히 그동안 나에게 있었던 사실로서의 일과 느낌을 정보로만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나의 상황과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긍정하며 의미화 하는지가 담겨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헤매고 고민하며 또 다시 얼굴로 시위했다. 그동안의 모든 고민들이 폭파했고 기억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감당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게 했다. 첫 스타트는 이야기와 위치였다. 동화책을 만들 때부터 줄곧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영화를 찍을 때도 나를 괴롭히던 것은 어떤 ‘이야기’를 담아내야 할지 아득했을 때였다. 알지도 못했고 고민도 안했다. 머릿속 물음표는 질질 끄는 드라마처럼 그렇게 점점 길어져만 갔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왜 알려고 하지 않았던 걸까에 대한, 그리고 위치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던 자신을 향한 자책이었다. 항상 ‘진심’인지 모를 얄팍한 의미부여를 해왔다. 더 깊이 알려고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렇기에 생겨난 버릇 중 하나는 내가 하는 말과 작업을 의심하는 일이었다. 결국 내가 하는 말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까지 다다르자 허구헌날 눈물콧물 쏙 빼고 있었다. 작업 하다가도 너무너무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울고불고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었을 거다.
그 와중에도 어찌됐든 내 작업은 끝까지 잘 끝내야겠단 오기가 생겼다. 마지막 수료학기를 진상으로 시작해서 진상으로 끝낼 수만은 없었다. 그럼 너무 슬플 것만 같았으니까. 고민은 또 고민을 낳고 거기에 대한 글도 써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쯤, 거짓말 안 보태고 2년 동안 밥 먹듯이 들었던 ‘전체를 볼 줄 아는 눈을 키워라’는 게 괜히 한 말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토시오(영화 ‘주온’에 나오는 소년 귀신)를 닮았단 이야기도 종종 듣고 시야 가리는 그 옆머리 좀 어떻게 해보라는 말도 자주 들었는데, 이게 그때의 내 내면과 거리가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꺼번에 밀려오는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 단무지마냥 절여진 나에 대한 후회와 고민은 마음을 후벼팠다.
주변 시야에 전혀 눈을 뜨지 않는 내가 보였기 때문에. 그 참을 수 없는 무관심과 무식함에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나불댔던 지난날의 내 입이 어찌나 방정스레 느껴지던지. 그 사실을 지금껏 무마하고 외면한 거다. 더 고민하고 더 생각하고 더 알아야 했지만 이번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일단 보류시킨 뒤 그걸 토대로 시나리오를 쓰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여기저기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내 간절함이 통한 건지 고맙게도, 다들 각자 할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도와줬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마지막 날, <사랑하는 모든 것>이란 제목을 달았다. 마지막 쇼하자를 앞두고 아프리카에 열흘간 다녀와야 해서 상영회에 틀어진 영상을 보진 못했다.
가기 전날까지 급하게 마무리하고 에세이는 거의 날림으로 쓰고 편집하던 모습이 비행기 안에서 다시금 상기되자 이번 학기 참 뭐했나 싶더라. 하지만 적어도 학기 키워드였던 ‘깊이’에 대해 조금은 가까워지려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무기력함과 자기 함정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기간이 길었지만, 애썼다. 슬펐지만 곱기도 했다.
아직 수면 아래로 깊게 잠수 하지 않았다. 더 깊이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고 난관에 부딪히는 경험을 이제야 조금 해봤을 뿐이다. 준비 운동조차 제대로 하고 들어가진 못했지만 힘들어도 어설프게나마 수영은 해본 거다. 좀 더 배우고 움직이고픈 욕심이 생긴다. 하나씩 필요한 것을 알아가는 과정을 겪은 올 봄부터 여름은 숨가빴다. 날은 후덥지근하고 내 몸도 뜨겁다. 날씨가 더운 게 아니라 내 몸에서, 그리고 마음에서 나오는 열이 뜨거워서 주위가 뜨겁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간절함이 필요했고, 지금도 여전히 필요 하다.
0-2. 2.5의 해석
전구가 자주 깜빡이긴 했지만 결코 완전히 불을 꺼버리려 하진 않았다. 지금 하고 있고 몸담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선 안 된다는 걸 알기까지의 지난 2.5년의 전구는 갖은 수모를 겪었다.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최면을 걸고 합리화 하곤 했지만 동시에 함께 하는 작업에 대해 알고 관계를 맺고 내 간절함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 내가 진정 사랑하는 것을 찾진 못했다. 사랑을 제대로 하는 것인지조차 의심하기만 한 채로 멈춰버린 것 같다. 다만 어느 정도의 사랑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라는 걸 알고, 앞으로 그 사랑할 것을 찾고 싶은 마음도 여전하다.
처음과 달라진 게 있다면 나는 어디엔가 내 간절함을 정착시키고 싶다는 거다. 그것이 허황된 망상이나 단순히 저 멀리 아득한 미지의 꿈이 아니라 앞으로의 내가 살아갈 스물, 그 이후의 삶까지 연장해서 말이다. 찾자로 시작해서 찾자로 끝나는 이 에세이가 뭔가 싶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후벼 파본들, 엄청 대단하다거나 아주 훌륭하다 싶을 만치 무언가는 없다.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기억만 더 또렷할 뿐이라 에세이에 적어내리기 조차 탐탁찮다. 블로그에 비공개로 혼자 끄적거리는 글이라면 욕을 한바가지 썼을 거다. 반성문으로 이 8쪽을 채울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렇게 수료를 말하게 되고 에세이를 쓰게 되는 것은, 결코 내가 이곳에서 부끄러운 시간만을 지내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도피하다시피 이곳에 와서 정말 찾은 것은, 난 앞으로도 펜을 들고 그림을 그릴 거란 확신이다. 생각을 깊이 할수록 머리 아파져서 금방 관두는 습관에 따라, 잠시의 권태기에 주저 없이 아니라고 돌아서버렸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빙글빙글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펜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게 좋다. 마지막에 만든 애니메이션 <사랑하는 모든 것>의 제목처럼, 나는 내가 잡은 펜을 사랑하고 맺고 있는 관계와 작업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것에 내 간절함을 쏟을 차례다. 그것을 안에서 품고만 있을 때가 너무 슬픈 일이란 걸 안다.
그리고 싶어도 무엇을 그릴지 몰라서 펜을 놓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무슨 얘길 써야 할지 몰라서 힘들었던 적도 두세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걸 찾고 싶음에 쏟은 슬픔과 수고가 빛을 발하진 않았다. 꿈꾸던 좋은 결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뭘 하고 싶은 지를 찾기 위해서 필요하고 할 수 있는, 하자는 그 많은 요소들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내가 끊임없이 불을 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해줬다.
그 힘으로 이제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불을 켜며 스물을 맞을 요량이다. 대학가서 좀 더 지식기반의 공부도 하고 싶고, 작업도 충분히 많이 하고 싶고, 운동도 하고 싶고, 자전거 여행도 다녀올 거다. 무언가 또 새로운 배움이 있단 설렘에 벌써 콩닥대지만 한편으론 수료식 이후 더 이상 작업장학교의 죽돌이 아닌 채로 남은 열아홉을 보낼 생각에 마음이 조금 횅해지기도 한다. 이럴수록 담담함으로 맞서고 싶다. 첫 걸음으로 내 마음에 불을 켜야 한다.
그렇게 밝히고 보이는 길,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가며 찾아보려 한다. 남들보다 뒤쳐진 걸 수도 있고 그만큼 더 불안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지금 당장 찾았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그것은 변화할 테니 크게 개의치 않는다. 홀로 불을 켜든, 남들과 같이 켜든, 지금 여기서 겪고 배우고 쓴 것들이 모두 다시 내 마음에서 빛을 내길 바란다. (꺼지게 내버려 둘 것도 아니지만.) 그러기 위한 또 다른 학습의 여정이 내 첫 2.5 전구, 그리고 지금의 수료를 발판으로 삼아, 더 밝은 빛을 내기 바란다.